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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4회)

충남시대 2023. 5. 16. 16:30
옹근 달빛

 

 동호가 연주를 다시 만난 것은 이태가 지나서였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동호는 귀향을 늦추다가 졸업식을 마치고서야 고향에 내려왔는데 연주에 대한 어머니의 온정은 더욱 곡진했다. 
  “한 달쯤 지나면 우리 마당은 꽃밭이 될 거다. 채송화, 봉선화, 금잔화, 분꽃, 모두 연주가 심은 거야. 네가 집에 온다니까 우리 연주가 얼마나 집 단장을 했는지 몰라. 몸치장에도 정신을 쏟았구.”
  연주는 얼굴을 붉히며 부엌으로 달아났다. 어머니가 웃음을 띤 채 부엌에 대고 소리쳤다.
  “우리 연주만한 처녀도 드물지. 나는 평생 연주하고만 살란다. 인물 예쁘고 심덕 좋고 신부감으론 최고지. 서울것들은 되바라져서 싫어.”
   어머니가 저런 식으로 연주를 치료하고 있었구나....
  동호는 어머니가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 그런 부추김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추켜세우다가 실망시켰을 경우 병이 도로 악화될 건 뻔했다. 그런 걱정을 눈치챘는지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동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가 연주를 무시하는 모양인데 사실 저애만한 처녀도 드물다. 이제 병도 나았으니 근동에서는 보기드문 처녀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에요? 저런 애한테 맘을 주라는 거에요?”
 “맘을 주라는 게 아니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라는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는 연주네가 원래는 괜찮은 집안이었단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풍비박산한 거래. 연주 아버지도 원래는 백정이 아니고 할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거덜나자 백정이 데려다 딸처럼 키웠다는 거야. 연주가 성치는 않아도 왠지 뼈대가 있어 보였니라. 하기야 그게 뭔 대수겠니. 백정 핏줄이면 어떻고 어중이 핏줄이면 어떠냐. 사람 됨됨이가 중한 법이지 집안이 뭔 소용이겠어.”
  그날 밤 동호는 달빛이 깔린 마당가에 서서 연주의 모습을 되새겨 보았다. 이슬방울처럼 맑은 얼굴과 훤칠한 몸매가 새삼 돋보였다. 그녀가 차린 저녁 밥상 역시 단아한 규수의 솜씨처럼 깔끔해 보였다. 저녁식사 때도 연주는 동호가 좋아하는 콩나물 무침과 두부조림을 앞으로 당겨주곤 했는데 그 정성이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만큼이나 고와보였다. 
  연주의 병이 정말 나은 걸까?
  동호는 애써 머릿속에 그녀의 고운 모습만을 담아보았다. 아까 마루에 앉을 때 얼비치던 치마 속의 하얀 허벅지와 터질 듯한 팽팽한 젖가슴이 금방 샅을 자극했다. 어머니 몰래 연주를 불러내기로 작정한 동호는 미리 집을 빠져나와 뒷동산 분지 쪽으로 걸어갔다. 어린시절에 몸을 굴리며 놀던 풀밭이었다. 
  분지에 오른 동호는 달빛이 뿌옇게 깔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언덕 아래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하얀 원피스로 차려입은 연주가 달빛을 등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원피스가 옥색처럼 반짝거렸다.    “원피스가 아름답군. 연주도 흰색을 좋아하나봐.”
  곁으로 다가온 연주에게 동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동호씨가 사주신 건데 잊었나보군요.”
  연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차, 무안해진 동호는 얼떨결에 연주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를 잘 모시는 고마움의 표시로 지난봄에 서울에서 소포로 보냈던 선물인데 까막 잊었던 것이다.
  “내가 바보군.”
  농담을 던진 동호는 얼른 연주의 몸을 끌어안아 마른 풀섶에 뉘었다. 달빛이 젖은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야울거렸다. 

  몸이 풀리자 동호는 연주를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연주를 껴안은 사실이 현실로 여겨지자 그녀의 몸이 금방 읍내 길가에서 해바라기하던 미친데기 꼴로 떠올랐다. 담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손으로 자기 치마 속을 만지작거리던 연주의 실성한 모습. 동호는 자기의 몸에 연주의 때가 묻은 것만 같아 그녀를 버려둔 채 개울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던 동호는 핸드폰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연주를 찾아갔을 테니 병세가 어떤지 알고 싶었다. 
  “여보, 진리포구라뇨? 평창 리조트공사장에 간다는 분이 왜 거기 계시죠?”
  “그럴 이유가 있소. 집에 가서 설명하리다.”
  “중대한 일에요?”
  “아무 것도 아니니 걱정 말아요.”
  “무슨 일인지 답답하잖아요.”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무장공비를 만났소.”
  “그 사람 만난다는 얘길 왜 숨긴 거죠?”
  성미의 목소리에는 서운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이유는 집에 가서 밝히기로 하고.... 연주의 병세는 어떻소?”
  “병원측 말로는 아주 좋아지고 있대요. 내가 봐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요.”
  “모두가 당신의 지극정성 덕이지. 그럼 나는 내일 출발하리다.”    
  “진리포구서 주무실 건가요?”
  “물론이오. 박 기사는 도착 즉시 강릉으로 보냈소.”
  “거기에 혼자 계시다고요?”
  “무장공비와 함께 있지.”
  “밤새 같이 지낸다고요?”
  “캐볼 게 있어서 그래요.”
  “캐볼 게 있다뇨? 왜 자꾸 궁금증만 증폭시키죠?”
  “그것도 집에 가서 풀어주리다. 당신한테 말해줘도 이해 못할 궁금증이오.”
  “암튼 진리포구는 잠자리가 불편할 텐데 조심해요.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지만....”
  “많이 변했소. 횟집과 카페가 즐비하고 모텔도 생기고.” 
  “세상에, 진리가 그처럼 변하다뇨....”
  성미의 목소리에서 금방 힘이 빠졌다. 그녀에게는 진리포구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진리포구가 동호에게 있어 추억을 살려내고 싶은 곳이라면 성미에게는 추억을 죽이고 싶은 곳이었다. 동호가 진리포구에 발길을 끊은 것도 성미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성미에게 있어 진리포구는 동호를 처음 만난 추억 어린 곳이면서도 한편 가슴 아픈 곳이기도 했다. 태풍에 조난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건진 곳이 진리포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