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2회)

충남시대 2024. 1. 30. 13:32

박정희 의장이 구상한 ‘인공강우’


 나는 틈틈이 헌무의 편지를 다듬어주었다. 세 번째 편지부터 애인의 답장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헌무는 자기를 사랑한다고 적힌 애인의 편지를 들고 내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는 자연히 서울파의 미움을 더 사게 되었다. 서울파 두목은 내게 종종 압력을 넣곤 했다.
  “너는 서울에서 용산고를 다녔으면서 부산놈과 어울리냐? 그렇게 배알이 없니?”
  “학교로 따지자면 부산에서도 중학교를 다녔거든.”
  “부산? 충청도 촌놈이 더럽게 많이 쏴다녔네.”
  “너 깔치 있어? 깔치 있으면 너한테도 연애편지를 대필해줄게.”
  “알겠다. 너하고 친해지려면 깔치가 있어야겠구나.”
  그날 밤이었다. 취침점호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서울파 두목이 나를 살며시 밖으로 불러냈다. 그의 손에는 플래시가 들려 있었다. 내무반 밖으로 빠져나온 서울파 두목은 몰래 나를 콘센트 구석으로 데려갔다. 나는 주먹세례를 받을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것 좀 읽어봐.”
  두목이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며 플래시 불을 켜주었다. 마음이 놓인 나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편지를 펼쳤다.
   “야, 이런 글은 안 돼. 이런 글은 ‘부모님전 상서(上書)’에나 맞는 투라고. 젊은 깔치한테 보내는 편진데 산뜻해야지. 그리고 입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냐.”
  “그럼, 어떻게 써야 산뜻한 거지?”
  “그걸 말로 설명할 순 없고, 내가 초안을 잡아줄 테니 네 글씨로 다시 써봐.”
  “고맙다, 암튼 헌무가 실속 있는 놈야. 너하고 일찍 사귀었으니 얻어들은 게 많을 거라구. 원래 밀수쟁이라 눈치가 빠르거든. 서울놈들은 겉만 약지 속은 맹하다구.”
  서울두목은 연방 주절거리며 내게 다정히 손을 내밀었다. 그 이튿날부터 내 주선으로 헌무와 서울파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1961. 5. 20

  내무반에서 밤마다 실시하는 저녁점호 시간이다. 구대장이나 주번사령이 참여하는 점호에는 틀림없이 기합이 따랐다. 군인의 길을 큰소리로 음창(音唱)하고 고향예배가 끝나면 징그러운 기합이 시작되었다. 무슨 트집을 잡든 기합을 받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덮고 자는 담요를 반듯하게 개놓고 모서리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야 했는데, 마루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일직선이 되도록 선을 잡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선에서 어긋나면 “00번 한 발 앞으로!” 하고 입에 칫솔을 물린 채 뺨을 치거나 “엎드려뻣쳐!”를 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스런 기합에서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주먹 쥐고 엎드려뻣쳐!’나 팬티 바람에 머리를 땅에 댄 채 뒷짐을 지는 소위 ‘원산폭격’을 당하기도 하고 코트를 입은 채 당하기도 했지만 그 고된 기합에서 낯선 재미가 느껴지곤 했다. 뒤에서는 끽끽 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주먹을 잘못 쥐었다는 이유로 밀림(때림)을 당하기도 한다. 엎드린 팔을 따라 땀이 흘렀는데 그때마다 아이고! 소리를 지르는 자들이 많지만 나는 웃음이 났다. 아버지 고생을 생각하니 그만큼 독이 오른 것이다. 내게 있어 군대는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편안한 안식처였다. 고생하는 곳이 아니다. 그따위 기합은 낭만이나 다름없었다. 


1961. 5. 22

  유성 항공병학교에서 대전까지 장거리 완전복장으로 보행을 실시했다. 우리 31중대는 보행 후 대전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귀대 후에는 군목(공군 중령)의 신앙과 혁명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나는 내무반으로 향하는 중에 별을 보며 생떼쥐베리를 생각했다. 저 별이『어린왕자』를 쓰게 했을 것이다. 


1961. 8. 7

  기술교육단 항공병학교를 수료하고 공군통신전자학교에 입교했다. 나에게는 보람된 생활이었다. 내 고질병인 태만과 소극성이 규칙생활에 점점 고쳐지고 있었다. 
      
  
1961. 9. 3

  밤에는 기합을 받았다. 이불 정리가 잘못되었다며 내무반장이 91기에서 나 하나만 불러냈는데, 내일 학과장에서 1교시를 끝내고 빠따 1개를 장만하라고 지시했다. 거의 죽을 정도로 맞으면 의무대에서 치료 받으면 되지만 정말 맞아죽으면 부모님 때문에 걱정이다. 


1961. 9. 25
 
  외출을 나가 대전극장에서 <타임머신>을 감상했다. 내가 어째서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지 그게 이상했다. 제3차원을 넘어 제4차원의 정복. 드디어 시간을 정복한 것이다. 

  내가 고안해낸 속기를 연습했다.


1961. 11. 4

  오전에는 고층기상에 2500그램짜리 바룬(풍선)을 띄우고 지엠디 원에서 캐취하여 보낸 레코더를 잡았다. 최고 12만 휘트 상공, 2미리바에서 0미리바까지 올라가는 모뷸레이터와 트랜스미터의 기온, 습도, 풍향, 풍속을 무선 송신하는 근무를 마쳤다.  
  낙엽이 날리는 황량한 모습을 보며 낙서를 해본다. 

    겨울은 범죄자

  낙엽이 날리기 시작한다
  가을이여! 
  그대의 체온을 높여다오 
  그대가 데려올 북풍과 폭설을 생각하면 
  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지나니
  가을이여! 
  제발 범죄자가 되지 말아다오
  
  밤에는 내무반 정기 오락회 시간이다. 내무반장은 내게 사회를 맡겼다. 웃음, 흥분, 융합, 감격을 빚어내는 내 솜씨와 말재간이 보통 아니다. 
  오락회 끝판을 장식하는「두꺼비 맘보」는 필수 합창곡이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마시고 또 마시면....”


1961. 11. 21

  3명이 기상 관측을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초저녁 운고(雲高)와 시정(視程)을 보기 위해 풍선을 띄우는 작업이었다. 풍선에는 계측기가 매달려 있었다. 20노트의 바람이 내 머리칼을 사정없이 휘날린다. 산 정상에 불빛이 환하다. AS구름에 가려진 희미한 달빛이 고향 추억을 떠올려준다.


1961. 11. 28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동료와 함께 열차를 탔다. 공군 복장인 채 열차 안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니 열차 승객들이 웃는다. 공군복장은 누구나 멋지게 보이는 모양이다.
   

1961. 12. 7

  오늘 일기는 부산(K-9)에서 여의도비행장을 거쳐 김포(K-14)까지 날아가는 수송기 안에서 쓴 것이다.  
  항공병학교에서 혹독한 군사훈련(3개월)과 통신전자학교에서 일기예보 실습교육(4개월)을 마친 나는 서울 대방동에 있는 공군본부 중앙기상부로 배속되었다. 여의도비행장까지 동행할 동료 2명은 연평도와 오산비행장으로 배속되었다. 우리 91기생 3명은 7항로보안단이 있는 대구에서 배속 신고를 마치고 여의도비행장으로 가기 위해 탑승권을 받아들고 오퍼레이션으로 달려갔다. 대구 동천비행장에서 탑승터미널까지 우리를 실어다준 쓰리쿼터가 없었던들 이 즐거운 처녀비행은 못했으리라. 나는 군용백을 메고 레코나이션스 C-46기의 사다리를 밟으며 마음이 들떠 있었다. 경유지인 부산 수영비행장에서는 장교 탑승 관계로 좌석이 모자라 3명은 캔슬 당할 뻔하다가 조종사의 배려로 여의도비행장을 거쳐 김포까지 탑승하게 되었다. 기상 특기자는 사병일망정 조종사와 밀접한 관계였다.
  20여 분을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꽃다발만한 크기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 대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정도 지나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해서 신고를 마치고 밤 늦게야 취침했다.

  아까 대구역전에서 겪은 일이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
  “공군 아재, 주무시고 가이소. 색씨값 싸게 드릴께예.”

  
1961. 12. 8

  대방동 공군본부 경내에 있는 중앙기상부 통계과로 배속되었다. 예보과에 배속되어야 정상인데 나는 글씨를 잘 쓰는 덕에 통계과 과장인 김용술 소령이 특별히 차출했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중앙기상부는 정부기관인 국립중앙관상대에 정보를 제공해줄 정도로 기술 수준이 높았다. 나는 전대장(戰隊長)인 중앙기상부장(공군대령)과 함께 관상대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전대장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구상중인 ‘인공강우(人工降雨)’ 정책의 통계업무를 담당하고 있어 자주 경무대(훗날 청와대)에 들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