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환을 1원으로 화폐개혁
“결국 폐병으로 죽었구나. 참 가여운 친구야. 네 맘이 괴롭겠다. 네 허무의 시원은 혜연의 죽음일지 몰라. 너를 진정으로 사랑했잖니.”
“내 허무는 그런 인간적인 삶으로 해결될 허무가 아냐. 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날 무시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암튼 넌 이상한 존재야.”
“그나저나 어찌된 거야?”
“벌써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너와 만나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던 차에 우연히 너와 성지순례단에 끼게 된 거야. 그때 도도한 네 모습에 반한 거구.”
“이런이런, 참 기막힌 인연이구나. 티브이에서 본 그 동양적인 미모에 지성미 넘치는 진가영이 민주라는 건 상상도 못했어. 성형수술했니?”
“아니.”
“그런데 어찌 네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거야?”
“얘좀 봐. 너와 헤어진 지 자그마치 40년이 지났어. 그러니 어찌 알아보겠어. 그런데 진구가 네 소설집 작가의 말을 읽고 네가 진짜 잔아라는 걸 알았던 거야.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지.”
“그런데 왜 이리 허망하냐? 놀랄 것도 없고, 반가울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고.... 기분이 왜 이러지?”
“이럴 때 필요한 게 술이잖니.
“참,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는 생존해게시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어. 엄마가 생전에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잔아가 네 짝이 되길 바랐는데, 그러셨어.”
민주의 눈자위에 맺혔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가 손수건을 꺼내주자 그 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 서울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1962. 2. 3
오늘도 공군중앙기상부 전대장 지프를 타고 함께 중앙관상대로 출근했다. 따스한 스팀이 찬 몸을 녹여주었다. 3층 통계과와 천문과 사이에 우리 근무실이 설치돼 있었다. 나는 글씨 잘 쓰는 덕택에 이곳에서 전대장과 근무하게 된 것이다. 해군기상대장(소령)도 함께 일했다. 우리 업무는 전대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경무대)에 가서 브리핑하기 위한 자료정리다. 문교부 소속인 관상대를 교통부로 이관하기 위해서다. 나는 특별 휴가를 받아 아예 누나네 집에서 출퇴근했다. 매부가 죽은 후로 누나네 집은 늘 조용했다.
선배들이 나보고 군인 쫄짜로는 아까운 인물이라고 한다, 특이한 인물이라고 칭찬한다. 통계과 미스 심도 나를 특이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그녀는 우리 사무실 타이피스트였다
1962. 3. 24
박정희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 시작.
윤보선 대통령은 그저께 사임했다.
부산 헌무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오고, 그의 애인 미스 킴에게서 편지가 왔다.
1962. 4. 5
오늘은 식목일. 나무를 심었다.
10기 하사관 진급 술을 마시고 병을 깨며 싸우다가 전체 기합을 받았다.
1962. 5. 26
담배 팔아 500원을 갖고 외출했다. 공군 104기생인 원지하를 찾아가 메트로 감상실에서 음악을 들었다.
1962. 5. 29
중앙기상부에서 근무한지도 반년이 가까워진다. 고요히 깊어가는 밤, 누더기 진 계곡에 안개는 서리는데, 피곤한 달빛은 산 너머로 쉬어지는데, 새벽 4시인 지금도 내 영혼은 분주하기만 하다. 어깨에 멘 총대를 매만지며 순간마다 교차하는 지난날을 반추해본다.
빅뱅으로 형성된 우주라면 그럼 우주 밖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에 몰두하는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라. 그거에 의해서 나는 너를 보리라. -소크라테스
1962. 6. 2
온 국민이 기다리던 비가 온다. 최고회의 한발대책위원회와 인공강우 계획도 취소될 판이다. 그동안 인공강우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관심 때문에 중앙기상부에서는 통계자료를 뽑았고 전대장과 나는 관상대로 출퇴근했던 것이다.
1962. 6. 10
환을 원으로 화폐개혁 실시. 교환비율은 10:1.
10환을 1원으로 바꾼 셈이다.
1962. 6. 15
공군본부 중앙기상부에 배속된 지 7개월 만에 휴가를 얻어 아버지를 찾아갔다. 1년 50일 만에 뵙게 되는 셈이었다. 그동안 마곡사에서 불목하니로 살아가셨던 아버지는 공주 사곡면에 있는 구룡광산 주인집으로 옮겨 품을 팔고 계셨다.
아침에 규암으로 나가 청양행 버스를 탔다. 산협을 뚫고 버스는 험한 자갈길을 달렸다.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점심 무렵에야 금정리에 도착했다. 푸른 들판을 지나고 맑은 시내를 건너 사양에 이르자 구룡광산이 멀리 보였다. 나는 수치심을 참으며 이 지방 갑부인 강씨 집을 찾았다. 주인댁은 친절했다. 내가 한산에서 오신 어른을 묻자 며느리로 보이는 새댁이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며 "네.... 용자 수자 되시는 어른 말씀이죠?" 한다. "제 부친이십니다."
할머니가 굽은 허리를 가누며 들 건너 보리밭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아버지 모습을 보자 뛰어갔다. 허리가 굽은 채 밭둑을 오르시는 아버지를 부추겨 그늘에 모시고 인사를 드리자 노동에 지친 아버지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말아야 한다!
이윽고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오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정직하고 근면하고 인자하신 게 죄일는지, 어찌 저런 분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이 주어졌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 대신 얼른 낫을 들고 보리를 베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점심 때 일어났다. 내 점심을 다른 머슴들과 같이 차리려다 아버지의 만류로 아버지와 둘이만 겸상하게 된 것이다.
“이 애는 머슴이 아니니....”
자신은 시궁창이 되어도 자식만은 깨끗한 곳에 놓아두겠다는 자식 사랑이 내 통곡을 자아냈다.
훗날 양자 간 형이 또 한 번 내 분노를 자아냈다.
“왜 하필 그 집에서 일했는지 몰라. 챙피해죽겠어.”
그집 아들이 대학 동기였던 것이다. 나는 형의 뺨을 치려다 참았다.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 저런 걸 작은댁에서는 논밭을 팔아 대학에 보냈으니!
나는 지난번 휴가 때 아버지 손에 억지로 1000원을 쥐어드리고 들길에서 이별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안온한 휴식처를 얼마나 바라실까! 내 말에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그러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걱정하고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는 법이다.... 그래라. 그저 한 식구가 모여 옛말 이르고 한 때 살아보자. 어떻게 일 년 반이야 못 참겠니. 너나 몸 편히....”
나는 어떻게든 아버지께 위로 될 말을 찾아냈다.
“아버지, 혹시 제대 후에 어떻게 취직될지 하고 염려되시죠? 걱정 마세요. 아버지 위안 드리려 하는 말씀이 아니라 취직은 걱정 없어요. 만일 안 된다 해도 제대 그날로 부모님 모시고 조용한 방에다 심심찮으시게 라디오도 사놓고 서울에서 살겠어요. 아버지 올 겨울하고 내년만 넘기시면 돼요.”
“그럼 어서 가거라. 차 조심해라. 네 몸이 중하니까.”
아버지와 들길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는 중천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면 일부러 밀짚모자로 얼굴이 가려지도록 고개를 숙이시는 아버지. 오 신이시여! 나는 영원히 불행해도 좋으니 잠시라도 저 노인을 편안하게 돌봐주소서!
“주인집에서 옷 사입으라구 돈 1000원을 주는데 네 어머니 500원 주고 옷하고 고무신 한 켜래 사서 송당 민주네 집에 맡겼다. 자식만 믿고 사는 네 어머니한테 잘해라.”
백 미터 가량 떠나와서야 눈물이 앞을 막는다. 금정리까지 걸어나오니 부여행 버스가 없어 할 수 없이 70리를 걸었다. 하지만 조금도 고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행이 좋았다. 아버지는 굶은 채 자갈길을 걸어 마곡사까지 가셨잖은가. 오오 이 비통한 순간이여! 영원히 복수와 증오의 불길이 되어다오!
1962. 6. 17
밤에 부여 매부 자전거로 낙화암에 올랐다. 산새 소리가 부소산 송림 속에 재재하다. 사자루 마루바닥에 누웠다가 한밤중에 군창터를 다녀와서 낙화암 낭떠러지 위에 누워 뜬눈으로 황홀한 일출을 보았다. 예전에 군창터에서 주었던 불탄 까만 곡식 3알이 생각났다. 식전에는 소정방이 낚시질했다는 섬바위 밑에서 목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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