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3회)

충남시대 2024. 2. 6. 14:25

일등병이 참모총장실에 잠입하다


그처럼 부대장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나는 의가사제대를 내비칠 수 없었다. 공군은 지원병이라 의가사제대가 해당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최고사령관인 참모총장의 공감이 절실했다. 초가집도 없어 뿔뿔이 헤어진 노부모에 대한 연민과 그런 부모를 걱정하는 자식의 효심을 공감하지 못하고는 의가사제대는 불가능했다. 나는 부모 걱정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외아들인 탓에 부모를 의탁할 곳도 없었다. 누나네 집에 의탁한 어머니 때문에 누나의 시집살이가 걱정이다. 


1961. 12. 19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김용술 소령이 번역한『태풍예보』책을 며칠간 코피를 쏟으며 정리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권두언에 “一兵 金容滿에게 감사한다”고 적혀 있다. 

  펄벅의『대지』를 읽다. 
  늘 밤늦게까지 독서하는 나를 보고 예보장교 김용술 소령이 "그만 자지 그래" 한다. 

   
 1961. 12. 20

  육군 소위가 된 대성이가 찾아와 종일 함께 쏴다녔다. 용고 시절 친하게 지냈던 대성이는 지금도 자기를 이상(李箱) 시인과 같다고 한다. 확실히 괴짜다. 그는 이상의 소설『날개』를 좋아한다.


  1961. 12. 21

  외출 허가를 받아 헌병이 보초 서고 있는 공군참모총장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태극기와 총장기의 위용이 기부터 질리게 했다.
  “공군일병 김잔아, 참모총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제가 국방의 의무를 필하는 대신에 역시 대한민국 국민인 제 부모님이 기아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참모총장은 군종감(대령)을 불러 내 처지를 살피라고 지시했다. 참모총장 직권으로 내 참담한 처지를 배려했던 것이다.


1962. 1. 17

 영하 7도나 되는 연병장에 나가 팬티 바람으로 앞엣총을 하고 혼자 연병장을 30바퀴나 돌았다. 변소에 낙서한 죄였다. 판자벽에 “변소를 깨끗이 사용합시다.”라고 썼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바람에 1개월간 외출을 금지 당했다. 내무반장의 미움을 산 탓인데 진짜 이유는 일등병이 전대장과 통계과장의 업무를 돌봐주는 바람에 외박이 자유로운 특별한 배려가 질투심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어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내무반 생활 중에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어 괴롭다. 내게 있어 인생의 가장 고귀한 매력은 바로 창작행위다.


1962. 1. 18

 『신곡』을 읽었다. 
  확실히 혜연은 내 성장과정의 길잡이었다. 그녀는 내 미적 감정의 상징이었다. 나는 그녀를 베아트리체로 생각했다. 혜연은 나를 리드해온 셈이었다.

  
1962. 1. 21

  고요한 밤이다. 밖에는 영하 10도를 넘는 추위다. 콘세트 막사에는 20여 명의 반원이 침대에 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야곡(小夜曲)에 취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1962. 1. 31

  오늘이 민주 결혼식 날이다. 날씨는 맑고 따스했다. 나는 여러 관측소 일기실황표에서 K-5(대전)과 K-8(군산)의 금일 일기를 유심히 살폈다. 부여 근처의 일기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맑은 마음씨처럼 실황표는 맑은 날씨였다.  
  나는 관측실에서 천기(天氣)를 기입하다말고 착잡한 심정을 달래며 민주와의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어느 겨울밤 약속 시간에 늦은 민주가 아양 떨던 모습, 내 품에 안긴 채 길을 걸으며 깔깔대던 모습, 달빛에 반사된 요염한 모습, 이제야 사랑이 뭔지를 깨달았다며 울먹이던 모습이 가슴을 저몄다.
  가엾은 여성아 부디 행복해라!
  나는 혜연에게 바친 그런 정을 민주에게 주지 못한 불찰이 미안했다. 푸른 잔디 위에서 민주와 뒹굴던 추억, 빗돌 위에서 처음 키스해본 추억, 곁방살이 방에서, 안개 낀 숲속에서, 무량사의 초옥에서, 맑은 시냇물에서, 달빛 찬연한 계곡에서, 들길에서 뒹굴던 추억. 그녀의 순결하고 애달픈 사연은 내 가슴에서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 송당으로 이사 온 민주네 집에 찾아갔을 때 민주가 한 말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밤에 저수지 둑에서 가슴 아픈 대화만 나누다가 포옹할 때 민주는 울며 이런 말을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어. 지금이 제일 행복해.” 
  그대 영영 떠나,  서로 만남을 주저하고, 오히려 잊는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거룩한 자국들

  내 옆에서 등고선을 그리고 있던 김용술 소령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모두 잊어. 육체가 뭘 그리 중하다고 그래.” 
 
  다음은 그 당시의 내 심정을 49년 후에 쓴 장편소설에서 묘사한 장면이다. 민주를 톱 탤런트로 설정한 것은 작품에서나마 민주의 신분을 높여주고 싶어서였다. 톱 탤런트 한가영이 바로 민주인데 그만큼 민주에 대한 인간적인 정분이 깊었다는 증거였다. 다음은 주인공 한가영이 민주임을 밝히는 장면이다.

  .... 한가영은 산속에 있는 허름한 커피숍으로 나를 데려갔다. 씽글 지붕인 그 목제 건물을 실개천이 에둘러 흐르고 있었다. 커피 맛이 입에 당겼다. 처음 느껴보는 커피향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향이 묘하죠?”
  한가영이 물었다.
  “그렇네요. 기분을 이상하게 흔드네요.”    
  “그 맛을 즐기려고 가끔 들러요. 올 때마다 손님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지탱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유령의 소굴 같아요. 유령의 소굴은 동생이 한 말이지만. 혹시 진구란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글쎄.... 더 힌트를 주시면....”
  “제 동생인데, 선생님과 고향이 같거든요.”
  “네? 그럼 진 선생도 나와 동향이라고요?”
  “부여에요.”
  “부여 어디죠?”
  “충화요.”
  “어, 나도 충환데, 충화 어디요?”
  “오덕리요.”
  “오덕리 어느 부락이죠?”
  “새뜸.”
  “새뜸이라고요?” 
  “고향사람 아무도 우리 남매를 모를 거에요.”
  누굴까? 나는 흥분된 감정을 누르며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씨, 오씨, 권씨, 정씨, 구씨, 송씨.... 그럼 민주? 그래 맞아. 민주 동생이 진구였어. 자기 누나와 결혼하기를 바랐던 동생. 그럼 한가영이 민주? 어떻게 된 거지? 민주는 죽었는데?
  “이제 털어놓을게. 내가 민주야. 진구 누나 민주.”
  “민주라구?”
  “그래.”
  “뭔 소리야? 민주는 죽었잖아.”
  “놀라지 마. 내가 분명 살아 있는 민주라구.”
  “도대체 어찌된 일야? 민주가 살아있다니?”
  “그래. 네가 믿기지 않는 건 당연해. 이제 사실을 말해줄게. 우리가 뱃놀이할 때 나는 호수에 빠져죽지 않았어. 동네사람들이 횃불 들고 나를 찾을 때 무서워서 부들숲속에 숨어 있다가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집으로 갔어. 골방에 숨어 있다가 오빠가 기진한 엄마를 업어다 뉘고 또 나를 찾으러 나가길래 엄마에게 나타났어. 엄마는 쉬쉬하며 나를 계속 골방에 가뒀다가 이튿날 몰래 나를 데리고 대전 외삼촌댁에 갔어. 그 후 동네에는 아주 죽은 걸로 하고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지. 고향을 완전히 등진 채 살기로 한 거야. 나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에 다녔고.”
  “그처럼 숨길 게 뭐람?”
  “얘 좀 봐. 누나뻘인 내가 사랑에 미쳐서 자살했으니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창피하겠니. 훗날 서울에서 터를 잡은 후에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집안에 실토했지.”
  “기가 막히는군. 내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걸 뭘로 보상할래?”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처녀야. 그러니 잘됐지 뭐. 너와 진짜 살판났어.”
  “얘 아직도 미쳤구먼. 참 한가한 여자다. 아직도 철이 없는 걸 보니. 그런 네가 톱 탤런트가 된 게 미끼지 않아.”
  “난 네 속을 훤히 알고 있어. 너를 철저히 연구했거든. 네 작품과 작가론 작품론을 죄 독파했어. 그 바람에 난 독서광이 됐다구. 네 글을 읽을 때마다 눈물깨나 쏟았지. 그 처절한 환경, 그걸 극복하려고 고통과 타협했겠지. 내가 사랑한 잔아가 행복을 싫어하다니....” 
  “넌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질투했던 거야.” 
  “꼴값떠는 소리 말고....  참, 혜연은 어찌됐어?”  
  “혜연은 네가 죽고 나서 이태 후에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