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6회)

충남시대 2024. 3. 5. 13:44

경찰전문학교 교훈은 지식, 용기, 성실


1963. 3. 17

  매일 이력서를 써들고 이곳저곳 뒤져보지만 일할 곳이 없다. 약품, 화장품, 이름 모르는 물건들을 들고 쏴다녔지만 한 개도 팔리지 않았다. 팔릴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봐야지. 1년 반을 먼저 제대했으니, 살 방법이 생기겠지.

  헌무의 양복을 빌려 입고 남포동에 있는 천향사를 찾아갔다. 금성(훗날 LG) 라디오 외판원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보증금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차비도 없는데 보증금이라니. 나는 한번 믿어달라고 사정했다. 
  “물론 이 세상 누구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만 속는 셈 치고 절 믿어주십시오. 제 능력과 성실을 다해 팔아보겠습니다.”
  사장은 내 얼굴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보증금이 없어 그 대신 카달로그를 들고 다니며 판매해야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팔고 다닌 덕에 상품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팔고 돌아왔다. 일주일 후에 사장은 다른 직원들 몰래 나를 남으라고 했다. 둘은 고급 요리집에 갔다. 나를 달리 봤다고 한다. 
  “우리 함께 성공해봅시다.”
  고마웠다.


1963. 4. 3

  판매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모험을 하고야 말았다. 천향사나 다른 회사도 거리 관계상 판매를 금하고 있는 동래 지구에 나 혼자 판매를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에 시내에서는 1대 팔기도 힘드는데 동래에서는 7대나 팔았다. 몇 배가 넘는 매상을 올렸다. 대당 수당이 200원이나 300원이니 내 수입만 한 달에 2천 원 이상이 된다. 수금도 모두가 일수여서 매일 판매하며 수금할 수 있어 편리했다. 오후 늦게까지 외판을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사장이 노발대발했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오?”
  하지만 그 꾸중은 칭찬임을 알게 되었다. 사장은 직원 전원을 집합해 놓고 맥주파티를 열었다.
  “여러분, 잔아 씨의 노력을 본받으시오.”
  사장이 노골적으로 칭찬했다.
  내 생활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희망도 빛났다. 부모님을 곧 모실 것만 같았다. 헌무와 미스 김을 남포동으로 불러내 한 턱 내고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옷도 사입을 수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지 3개월 만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그런데 또 불행이 닥쳤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다시 비참한 상태로 돌아갔다. 비를 맞으며 시내를 누볐지만 한 대도 팔리지 않았다. 서면 일대의 약방, 양장점, 이발소, 미장원, 구멍가게 등을 뒤지고 다니다가 어느 미장원에 들렀다. 손님 없는 홀에서 아가씨 네댓 명이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들 중 주인 격인 아가씨가 나를 친절히 불러들였다. 그녀는 라디오를 팔아주겠다며 나를 유혹했다. 
  “아무 걱정 마이소. 내 친구들이 많이 팔아줄 겁니다.”
  라디오를 팔아준다는 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리고 만난 지 보름쯤 지나자 그녀는 이런 말로 내 조심성을 흔들어놓았다.
  “우리가 살림을 차리면 부모님도 모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무엇보다 부모님을 모실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그 동거가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걸어왔다. 부모님 모신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미장원도 빚에 넘어간 상태였다.

  나는 영도에 있는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갔다.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바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부모 생각에 몸을 던지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밥을 굶은 채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데 버스 천정에 붙은 라디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육군장교 모집과 경찰관 모집이 있다는 방송이었다. 장교는 제대가 어렵고 경찰관은 사표내면 그만이라는 말에 후자를 택하고 서류를 제출했다. 1차 시험에 합격하고 경남고교 강당에서 신체검사에 들어갔다.
  다음은 신체검사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소설의 한 부분이다.

  ..... 느그들 야가 신체검사할 때 생긴 일 얘기하모 뱃살을 잡을끼다.” 
  “먼데예?” 
  “합격 체중이 55킬로 이상인데 54.2킬로 밖에 안 나가는기야. 그래갖고 의사가 물을 마시고 오라캐서 양은 대접으로 세 대접을 마시고 달아보이까네 54점 8킬로가 나가는기라. 판정관이 엉덩이를 탁 치며 한 그릇 더! 캤는기야. 퍼뜩 한 대접을 더 마시고 달아보이까네 저울침이 54. 9킬로에 대롱대롱하는기라. 그래갖고 합격했제. 충청도 촌놈이 우째 그리 지독한고. 물론 부모님 땜에 환장했으이까네 뵈는 게 없겠지만서도, 그란데 5분도 안 돼갖고 야가 졸도했는기야. 머리가 삥 돌더란다. 오줌보가 터지고 나니께네 제정신이 들더라캤다. 잔아 늬 내 말 맞제?”  


1963. 8. 17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 입학을 위해 밤 10시 기차로 떠나야 했다. 차비가 없어 헌무가 준 매트레스와 책, 옷을 팔았다. 그녀는 또 악을 썼다. 메트레스 판돈과 옷 판돈 120원을 몽땅 주고 밤에 부산역에서 기차를 탔다.


1963. 8. 19

  41기생으로 입교식을 마쳤다. 초등교육반 9중대 25소대에 배속되어 40일간 교육을 받게 된다. 돈이 없어 준비 도구도 못 산 채 내무생활에 들어갔다. 150여 명의 중대원이 한 교실에서 소대별로 잠을 잤다.


1963. 8. 21

  제식훈련을 마치고 수사학에 들어갔다. 
  오후에는 안갑준 교장(경무관)의 특강이 있었다. 경찰관은 신사가 되어야 한다. 경찰관의 눈은 일반인보다 10배는 더 밝아야 한다. 사회를 법죄사회로 보라. 현장은 수사의 보고다. 현장에 갈 때는 살얼음 위를 걷는 자세로, 깊은 물속처럼 신중히 접근해라. 관내의 불량배나 전과자 등과 친해라. 구두닦이에게도 친절해야 정보를 얻는다.


1963. 9. 4

  단체생활이 재미있다. 300명 대원들은 만날 떠들어대며 웃기는 나를 좋아했다. “잔아가 없으면 쓸쓸해.” “잔아를 못 잊어.” 한다. 어저께 음악 콩쿠르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나는 9중대 대표로 나가 내 유일한 노래인 <대관령 길손>을 불렀다.

  경찰관은 애매한 말을 삼가고, 정치적, 종교적인 언사 삼가고, 상대방 말을 많이 듣고, 말을 적게 하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라     


1963. 9. 7

  난생 처음 인천에 갔다. 송도에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 음식점에 들어갈 때나 술을 마실 때나 차를 탈 때나 조심조심. 벌써 직업의식에 젖었다?


1963. 9. 9
  원지하가 면회와서 함께 뒷동산에 올랐다. 내 부탁을 들어주려고 그는 자기 시계를 잡혀 500원을 가져왔는데 200원만 받아 세면도구를 샀다. 고마운 우정이다.

  오후에는 수사학 강의가 끝나고 십오 분 후에 정보학 강의가 이어졌다. 강의 내용은 대공이론對共理論과 흐루쇼프 소련 수상의 평화공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사회체제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소련 대외정책의 기본 원칙이라지만 그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는 내용이었다.
 

1963. 9. 13

  외출 나가 서울에서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를 감상했다.
  요즘 부산에서 진성 콜레라가 유행하여 사람이 마구 죽어나간다고 한다.


1963. 9. 20

  오늘밤 경찰 신입생 1200명이 모인 가운데 음악콩쿨대회가 열렸다. 나는 우리 9중대를 대표해서 가수로 나가 <대관령 길손>을 불렀지만 밴드의 박자가 틀려 당선 못했다.


1963. 9. 23

  오전 수업을 마친 생도들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때 스피커에서 “잔아 생도 면회”란 공지방송이 나왔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누가 면회 왔을까? 나에게는 면회 올 친구도 없거니와 형제간이나 연인도 없었다. 나는 헛걸음 셈치고 위병소가 있는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잔디밭길을 지나 연병장을 가로지를 때였다. 위병소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갑자기 자지러졌다. 위병소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여자는 분명 애나였다. 얼굴에 품은 독기가 멀리서도 역력했다. 
“몰래 도망쳐 나와 취직했어?”
  애나는 대뜸 내 멱살부터 잡았다. 날쌘 공격이었다. 내 몸은 마취제에 취한 듯 금방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