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7회)

충남시대 2024. 3. 12. 15:06

이래저래 나 환장한 년이다!


  “이제 나와 상종 않겠다 이거지?”
  그녀는 계속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나는 방어자세를 취하지도 못한 채 멍청히 당하기만 했다. 대신 위병소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그녀 곁으로 다가서며 타일렀다.
  “아주머니 고정하세요. 여긴 신성한 교육기관입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죠?”
  “경찰관 교육기관 이랬잖소.”
  “누가 그걸 몰라 물었어요? 이런 사기꾼 놈을 합격시켜도 되냐 그 말이에요.”
  “참 싱거우시긴. 신원조회해서 뽑았는데 저 사람이 왜 사기꾼입니까?”
  “경찰도 썩었구먼. 이런 형편없는 걸 뽑았으니 썩을 대로 썩었어.”
  “뭐요? 썩어? 저기 기념탑에 새겨진 교훈을 읽어봐요. 지성, 용기, 성실.”
  “저따위 교훈이 뭔 소용이죠? 말짱 가짜로 써 놓은 건데.”
  “이 양반아 말조심해!”
  “말조심 안 하면 잡아넣을래요?”
  “무슨 내막인진 몰라도 하여튼 조용합시다.”
  “눈이 뒤집히는데 날 보고 체면 차리라고?”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나는 멱살을 잡힌 채 배실배실 웃기만 했다. 모든 걸 포기한 상태여서인지 숫제 마음이 편했다. 내 웃음 속에는 넝마 같은 내 신세를 샅샅이 관찰해 주쇼 하는 여유마저 깃들었다.
  “아주머니,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죠.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신성한 교육기관입니다.”
  “글쎄 신성한 교육기관이니까 이런 놈은 당장 쫓아내야죠.”
  “이봐요, 근무장소에서 욕은 삼가세요.”
  “이런 놈한테 욕 말고 무슨 말을 쓰라는 거죠?”
  “보자 보자 하니 뭐 이런 여자가 있어.”
  “뭐야? 이런 여자? 요것 봐라.”
  “이 여자가 어디 와서 행패 부려?”
  “행패? 좋다. 이래저래 나 환장한 년이다!”
  “어쭈…….”
  “선배님 죄송합니다.”
  나는 위병에게 대신 사과하며 그녀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악을 썼다. 
  “시팔, 이러면 나 혀 깨물어 죽을 거야!” 
  그러자 위병이 조용히 타일렀다.
  “도대체 당신 떼쓰는 의도가 뭐요?”
  “의도? 그래, 이 새끼 조지는 게 내 의도다.”
  “이제 점잖게 얘기합시다. 보아하니 당신도 배운 여자 같은데 인격적으로 해봅시다. 내가 당신한테 욕먹을 이유가 없잖소.”
  “너도 한패잖아.”
  “히야,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군. 사내를 이런 식으로 옭아매는 모양인데…….”
  위병은 고개를 돌려 나를 꼬나보았다.
  “이 머저리 같은 사내야, 왜 하필 이런 인간을.....”
  “죄송합니다. 이런 여자완 싸울 가치도 없습니다. 선배님이 참아주세요.”
  “차암 딱한 사내군, 쯧쯧. 암튼 조용한 데 가서 둘이 해결해 봐.”
  위병소를 떠난 나는 벙어리가 되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와는 일언반구도 나누지 않겠다는 고집이었다. 애초부터 너와의 인연을 거부해 온 나다. 너는 지금 계산을 잘못하고 있다. 나는 이 학교를 그만두면 도로 자유로운 몸이 된다. 너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제 본래의 순수한 나로, 영원한 이상과 그리움에 불타던 나로 환원될 것이니 네가 무슨 개지랄을 해도 좋다. 그런 배짱이었다. 그녀는 내 그런 속마음을 읽었는지 이런 말로 야지랑을 떨었다.
  “탈출하기에는 대한민국 땅이 너무 좁잖아?”
  “넘겨짚지 마. 대한민국은 넓은 땅야. 백 년은 너끈히 숨어 살 수 있어.”
  “그래라. 더러운 두 늙은이 데리고 꼴값 떨어라.”

     *

  졸업식은 경찰전문학교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정식으로 경찰관이 된 중대원들에게 인사담당이 각자의 배속지를 불러주었다. 경찰청(당시에는 경찰국) 단위 배정이었다. 대원들은 거의가 서울로 배속되었다. 나도 서울경찰청으로 발령이 났다. 알고 보니 시국 탓이었다. 앞으로 서울이 한일회담 반대와 월남파병 반대로 시끄러워질 판이라 그곳 인력수급이 우선이었다. 첫 부임지는 영등포경찰서였다. 한강 이남에 하나뿐인 경찰서라 관할이 넓었다. 동쪽으로는 흑석동이 관할인 명수대파출소, 서쪽으로는 부천과 경계를 이룬 오류파출소, 남쪽으로는 안양과 경계를 이룬 시흥파출소까지 넓은 관할이었다. (지금의 서초, 강남, 송파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농촌) 그 외 영등포 역전파출소를 비롯하여 노량진파출소, 상도파출소, 문래파출소, 양평파출소, 신길파출소, 신림파출소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나는 신길파출소로 발령이 났다. 신길동 신남동 신풍동이 관할인데 신풍동 일대 농지와 공동묘지는 절도범이 우글거리는 바람에 권총을 쏴서 제압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술집이 즐비한 신길동에는 담배를 꼬나문 아가씨들과 술 취한 주정꾼들이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마치 미국의 서부활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분위기가 거칠었다. 


1964. 2. 2
  
  밤 00시 30분, 내 아들이 태어났다. 이 날은 미국에서 달나라 정복을 위한 한 단계인 레인저 6호를 발사한 날이기도 하다. 나는 아들 이름을 성중(星中)이라고 지었는데 항상 내 가슴속에 담겨 있는 우주적 고독의 상징인 별성자와 돌림인 중자를 넣었다.
  밤새 근무하고 식전에 신남동 셋방에 돌아오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가 기쁘신 얼굴로 '아들'이라고 하신다. 마침 그저께 고향인 부여 오덕리에서 이사 온 민주 어머니가 계셔서 안심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 이불자락을 걷고 보니 애기가 잠들어 있다. 귀엽고 보배롭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일 뿐 금방 슬픔이 가슴에서 치올랐다. 성중이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다면, 하는 애석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도저히 내 아내가 될 수 없다.
  성중아, 너는 동정남에서 태어난 자식이어야 한다. 너는 결코 그녀를 에미라 부를 수 없다. 오 신이시여! 내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1964. 2. 15

  연흥극장에서 <말띠여대생>을 임검했다. 극장이 관람객으로 꽉 찼다. 상영 중에 기도가 임검석으로 찾아와 인사한다. 


1964. 6. 3
  
  나는 아침 일찍 경찰서로 출동하여 진압복장을 갖추고 2호 버스에 올랐다. 1호차 앞에는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에스코트했다. 다섯 대의 버스는 노량진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너 시내 쪽으로 달렸다. 비상계엄 선포를 예고하기나 한 듯 날씨가 음산했다. 하지만 나는 출동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그 시간만은 애나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어 좋았다. 만날 데모가 터져 진압 업무에만 매달리며 봉급을 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금년 학생시위만 해도 3월 30일 11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경부터 시위가 재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영등포서 출동부대의 대기 장소는 세종로 네거리였다. 가랑비가 내리는 세종로는 조용한 편이었다. 매일 격렬한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마치 잔치를 치르고 난 마당처럼 을씨년스럽기마저 했다. 나는 어제 연세대학교 데모대에 시달린 탓인지 몸이 나른했다. 연세대 데모대는 고려대 못지않게 끈질긴 게 특징이었다. 그들은 큰 덩어리가 깨지고 몇 사람만 남아도 협공으로 대들었다. 신촌고개는 진압부대에 있어 사자굴이나 다름없었다. 고개 언덕에서 돌을 던지면 속수무책이었다. 어제도 그곳에서 온종일 공격과 후퇴가 반복되었다. 어느 때는 경찰이 신촌 로터리까지 밀고 넘어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학생들의 치열한 공격에 아현동 고개까지 밀리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로 네거리는 아침부터 차량이 통제된 상태였다. 중앙청 정문 쪽 도로는 가시철망으로 된 바리케이드가 처져있고 그 안쪽으로는 군용 트럭으로 차량 바리케이드가 처져있었다. 도로를 일렬로 막은 트럭 적재함 뒷면에는 두꺼운 판자로 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치 판자울타리와 가시철망이 이중으로 쳐진 셈이었다. 그리고 철망 바리케이드와 차량 울타리 사이에는 대형 풍차와 최루탄을 발사할 기동대 정례부대가 도열해 있는데 내가 소속된 영등포서를 비롯한 각 경찰서 혼합부대는 그 후방에 배치되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추적거리는 가랑비와 육중한 전투태세, 세종로 거리에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풍차가 작동되었다. 잠잠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군용 트럭에 장치된 풍차는 대형 선풍기인 셈인데 풍차가 돌아가면 그 앞에 최루가스를 피워 데모대 쪽으로 날려 보낼 참이었다. 누가 짜낸 묘안인지 그럴싸한 대책이었다. 모기떼처럼 웽웽대는 데모대를 향해 풍차만 한 선풍기에 모기약을 뿌려 싹 쓸어버린다?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모든 진압부대원들은 눈을 크게 뜨고 구세주 같은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나는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격한 돈키호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