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9회)

충남시대 2024. 4. 2. 13:35

동경올림픽 때 북한 신금단 부녀 상봉


  “아냐, 독종이 많아. 밖으로 나오는 건 문리대보다야 덜하지만 아주 질긴 놈들야. 그놈들은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 만다니까.”
  “그나저나 문리대에 정치외교학과만 없어도 덜 시끄러울 텐데. 대학교에 정치학과가 뭐 필요해. 육사 출신만 해도 너무 숫자가 많은데. 권력기관은 거의가.....”
  “자네 큰일 날 소리 하는군. 말조심해.”
  홍기평은 내 팔을 끌었다. 저쪽 소방대원 대기실 다다미 바닥에는 노름판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개평 뜯을 게 아니라 우리도 한판 붙자고.”
  내 느닷없는 말에 홍기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 같은 철학자도 노름할 줄 아나?”
  “조금 해봤지.”
  나는 애나와의 갈등을 잊기 위해 한두 번 화투에 손댄 적이 있었다. 화투에 손대는 시간에는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혁명적이군. 하지만 자넨 절대 화투에 손대지 마. 아무리 심심풀이라지만 그것도 도박은 도박야.”
  홍기평은 언제나 충고 조의 말을 좋아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이제 아수라계에 발을 디딘 이상 탐독해야 될 철학서가 따로 있네. 자네도 생도시절에 배웠잖나. 세상을 온통 범죄사회로 보라고.”
  홍기평은 껄껄껄 웃고 나서 말을 보탰다.
  “내 여친이 자네를 보고 싶다더군.”
  나는 친구 애인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부터 나왔다. 그녀는 처음 소개받은 자리에서 내게 미국 배우 윌리엄 홀덴을 닮았다며 싱거운 말을 했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하여 붙임성이 좋은 여자였다.


1964. 8. 12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게 한 번만은 이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아마 이 일기는 네가 나이가 들어 자식을 키운 후에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네 에미를 엄마라 적지 않고 “그녀”라고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녀는 오늘도 독사 같은 혀를 내두르며 개새끼를 연발하고 네 할아버지 할머니께 “늙은 것들”이라며 욕을 퍼대는구나. 이유는 집을 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이 갈 데가 어디에 있겠느냐. “우리 며느리” 하며 귀여워해주시는 그 착하디 착한 시부모에게 물바가지와 잉크병을 내던지다니! 
  어젯밤에는 술에 취해 새벽에 차도에 누워 있는 걸 신길파출소 여직원이 데려왔니라. 내가 데려오려 했지만 아스팔트에 누워 악을 쓰는 바람에 도저히 데려올 수 없었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셨다. 신은 왜 저런 인간에게 벼락을 치지 않고 관용을 베푸시는지!
  태호야, 이게 네 애비의 현실이다. 너는 절대 그녀를 에미라 불러서는 안 된다. 하필 너를 낳은 에미가 이런 악마라니, 하지만 좌절감이나 수치심을 느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네 애비의 업보일 뿐이다. 아아, 시골에 가서 모든 것 잊고 산속에 숨어 살았으면 좋겠다.
  태호가 혜연이 낳은 자식이라면!
  혜연은 벌써 27세다. 5년만 기다려달라 했는데..... 더러운 운명이다. 


1964. 4. 16

  연일 계속되는 한일회담반대 학생들 데모로 오늘은 한양대로 출동한다. 우리 중대는 한양대와 건국대의 합류를 막기 위해 성동교로 돌진하는데 교문 앞을 통과할 때는 봐주던 학생들이 후퇴할 때는 캠퍼스에 있는 돌을 던지는 바람에 우리는 샛길로 빠졌다. 하지만 그 골목에는 쌀을 실은 우마차가 서 있어 나는 방석모와 방독면을 착용한 채 소등을 타고 넘다가 돌을 맞아 졸도하고 말았다. 돌은 방독면 생고무를 째고 우측 관자놀이를 찢었다. 엠브란스에 실려가 경찰병원에 입원하고 두세 바늘을 꿰맸다. 가스마스크 앞 유리에 튕긴 핏자국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조금만 옆에 맞았어도 즉사할 뻔했단다. 병원에는 오줌을 기계로 빨아내는 대원도 있었다. 
  병실 뉴스에서는 갈월동과 원효로 파출소가 불타고 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선두로 시위 중이라고 한다. 밤에 경찰청장, 내무장관,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청와대 등에서 위문을 다녀갔다. 


1964. 5. 1

   중부서 을지로 3가파출소로 발령. 한국에서 제일 좋은 파출소라고 한다.

  고려대 카니발로 대기 중인데 서울경찰청장과 경무과장이 방문했다. 광주에 시범부대를 파견하여 다중범죄진압법 및 신봉술을 시범 보여야 한다지만 사실은 신민당 시위를 예상한 위력시위였다. 정례부대 1개 소대 57명 차출에 내가 포함되었다.
  이튿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새 지급품으로 갖추고 장비도 새것으로 갖췄다. 아침 9시 30분에 호남선 특급열차에 탔다. 신분은 한국전력 사원으로 위장하고 장비와 복장은 가방에 숨겼다. 
  열차 한 칸을 전용한 열차에서는 술과 도박으로 엉망이었다. 광주역에 도착하니 전남경찰국에서 영접을 나왔다. 그 역시 위력을 과시하려는 위장이었다. 한편 광주에서는 기동병력 10여 개 트럭을 송정리에 극비리에 보내 우리 팀과 합류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도착시간에 맞춰 모든 사이클이 볼륨을 높인 채 시내 각처에서 떠들게 하고, 무전으로 “지금 서울 기동대 다수 하광중(下光中)”이라고 쇼를 벌였다고 한다. 밤에 외출하니 여기저기서 서울 기동대가 엄청 왔다고 수근덕거렸다. 


1964. 5. 8

  윤보선 서민호 박순천 등이 광주 남산공원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 궐기대회를 열었지만 겨우 3만여 명만 모였다. 데모에 돌입했으나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 과연 우리의 쇼 덕일까?


1964. 5. 27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 중인 박정희 대통령 경호경비를 나갔다.

  숙명대 음대생인 미스 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산공원으로 택시를 몰았다. 태호와 셋이 사진을 찍었다. 태호가 처음으로 “아빠,” 하고 불렀다.


1964. 8. 28

  절도범 2명을 수갑을 채워 수사과에 인계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혜연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썼다. 다음 글은 5년 만에 그냥 헤숙에게 써본 편지다.
  .....모처럼 고향소식을 들었을 때 그대가 벽오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마음 누를 길 없어 몇 자 전합니다.
  벌써 5년이 흘렀군요. 육체는 이리저리 굴러다녀도 그대의 모습은 점점 더 선연해집니다. 이러다간 내 몸 한 군데도 온전치 않을 것 같네요. 온몸에 멍이 번지고 나면 나는 또 한 번 광활한 시련과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체질마저 고통체질로 바뀔 겁니다. 행복 역시 형질이 바뀔 수밖에 없지요. 드디어 나는 고통을 사랑하는 묘한 인간이 되겠지요.
                                                                                         (상도동파출소에서) 


1964. 9. 30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가를 항상 알려줘야 한다.”
  지난 1963년 11월 22일 오스왈드의 총에 피살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아내 재크린 여사의 말이다. 나는 케네디의 저서『용기 있는 사람들』을 읽은 적이 있다.                
  

1964. 10. 10

  동경에서 18회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은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다내 23위에 그쳤다. 북한 선수 신금단이 극적으로 남한의 아버지를 만나 전국이 눈물바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