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8회)

충남시대 2024. 3. 19. 14:00

6.3비상계엄 선포


  풍차에 대한 진압부대원들의 기대는 컸다. 주먹만 한 사과탄 두어 개씩을 방어무기로 꿰차고 다니던 대원들에게 그 풍차는 원자폭탄이나 진배없었다. 지휘관들도 뒷짐을 진 채 국가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이바지할 괴물을 우러러보았다. 시민들 역시 데모판에 처음 등장한 그 괴물을 보기 위해 세종로 네거리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드디어 풍차 앞에 최루탄을 터뜨려놓았다. 그런데 최루가스가 시청 쪽이 아닌 중앙청 쪽으로 거꾸로 날아들었다. 데모대를 쫓아야 할 가스가 진압부대를 덮친 것이다. 바람의 역풍 탓이었다. 내가 속한 진압부대원들도 콜록콜록 재채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민들이 웃었다. 이제 풍차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학생들이 도로를 메워가고 있었다. 남녀가 혼합된 서울대 음대생들이 제일 먼저 나타나고 흰 가운을 입은 수의대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야 신경 쓸 데모대가 아니었다. 의대생, 약대생, 수의대생, 음대생, 미대생 같은 비전투요원은 한갓 구색에 불과했다. 숙성된 데모형태를 생일케이크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작은 촛불에 불과했다. 촛불이 없다고 케이크의 맛이 감소되는 건 아니었다. 그 비전투요원들은 싸울 마음조차 없다는 듯 바리케이드 앞에서 조용히 애국가를 부르고 관철사항만 낭독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기네들의 임무인 양 계속 합창으로 시간을 끌었다. 진압부대원들 역시 한가롭게 서서 그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위문단 같은데.”
  어느 짓궂은 대원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사실이었다. 데모하러 온 학생들이 아니라 격전지에 아군을 위로해 주러 온 고마운 위문공연단 같았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적과 싸우는 당당한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위문해 주러 온 공연단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우선 복장부터가 그러했다. 방석복에 가스마스크를 쓰고, 최루탄을 꿰차고, 방석모를 쓴 내 모습이 어설펐다. 어째서 저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이쪽 편에 서 있는 걸까? 나는 사과탄이 쥐어진 내 손이 가여웠다.
  공공질서, 치안역군…….
  나는 그런 합리적인 생각으로 겨우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었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지킨다는 한 가닥 자부심이 몸을 겨우 지탱해주는 셈이었다. 나는 몸에 힘을 꽂았다. 그때 시청 쪽에서 데모대가 몰려왔다. 구름처럼 몰려오는 데모대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순간 내 몸은 금방 굳어버렸다. 여기저기서 “대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는 구호가 진동했다.
  속은 거다!
  의대생, 음대생, 미대생 같은 비전투요원들의 노래는 격렬한 시위를 일시 감추려는 교란작전인 셈이었다. 오후부터는 데모대의 숫자가 늘어나 세종로에서 시청 앞까지 꽉 찼는데 데모대가 늘어감에 따라 분위기도 점점 사나워졌다. 사이드카 무전 연락으로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고려대 앞은 이미 저지선이 뚫리고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종로 쪽으로 밀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 부대에도 전투태세가 취해졌다. 사과탄과 경찰봉으로 무장한 대원들은 네거리 쪽을 향해 겹겹으로 방어벽을 쳤다. 드디어 페퍼포그에서 가스가 뿜어져나왔다.
쾅쾅쾅 여기저기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역풍 때문에 가스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 한차례 밀려나던 데모대는 종로 쪽과 서대문 쪽에서 몰려온 연세대의 큰 물결과 어울려 다시 먹장구름처럼 까맣게 밀려왔다. 그들의 함성이 거세짐에 따라 방어선은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학생과 민간인 숫자가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역부족이었다. 이미 폭도로 변한 일부 데모대들은 경찰차량을 빼앗아 불을 지르고 시가를 누볐다. 경찰 저지선이 파괴되어 진압부대는 중앙청 담 안으로까지 밀려났다. 차량 바리케이드를 뜯어 판자에 불을 댕긴 데모대들은 중앙청 철문 안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철문 여닫히기가 반복되었다. 수도방위사령부 병력과 합세하여 대치했으나 많은 경찰 차량과 장비를 빼앗기고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경찰관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데모대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폭도들은 빼앗은 차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다. 진압대원들은 교대로 방어에 나섰다. 임무를 교대한 대원들은 중앙청 지하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지친 대원들은 벽에 몸을 기대앉아 졸기도 하고 뒤숭숭한 시국을 걱정하기도 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헉헉대는 대원들이 늘어났다.
  “도대체 밥이 언제 배달되는 거야!”
  소리를 지르는 대원도 있었다. 별별 소문이 들리지만 졸개들은 당장 배고픈 게 문제였다. 함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불안감에 몸이 옥죄였다. 데모대들이 지하실 입구에 불을 지펴 태워죽이면 어쩌지? 나도 처음으로 공포감이 느껴졌다. 미처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새삼 내 위치를 깨닫게 했다. 데모를 막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늘 데모대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함성을 지르는 착각 속에 빠져 지냈는데, 이제는 그들이 무서워졌다. 나는 데모대를 무서워할 만큼 변해버린 나 자신이 또한 두려웠다.
  파출소가 불에 타고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중앙청 지하실에 저녁밥이 배달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상황이 위급했다. 중앙청 담 안으로 불붙은 각목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드디어 밤 8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출동했다. 포고령이 선포되자 통금시간이 아홉 시로 단축되고 각 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손목시계를 보니 21시 30분이었다. 
  경찰과 진압업무를 교대한 군인들은 진압대형을 이루어 저벅저벅 행진해 나갔다. 하지만 데모대들의 돌이 빗발치는 바람에 주춤거리다가 도로 중앙청 정문 쪽으로 후퇴했다. 두어 번 진퇴를 거듭하던 군대가 무장을 갖추고 돌격자세로 나오자 그제야 데모대들이 흩어졌다. 경찰진압대원들은 골목과 건물과 극장 등을 뒤져 숨어든 데모대원을 색출했다.

  한일회담 본회담이 2년 만에 개최되고 4월 국회에서 YTP사건(학원프락치 사건)과 학원사찰이 문제화되면서 시끄럽던 시국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무장군인 법원난입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이 혼미해졌다. 나도 매일 출동했다. 고참들은 돌 맞는 게 두려워 파출소 소내근무를 좋아할지 몰라도 나 같은 젊은 신참들은 역동적인 데모 진압이 훨씬 구미에 당겼다. 엄한 징계사유도 출동 중에는 눈감아주었는데 진압복장을 갖춘 채 아무데서나 화투를 칠 수 있는 것도 그 한 예였다. 평상시 같으면 문책을 당하겠지만 사기진작을 위해 눈감아주었다. 경찰서 강당이나 대기버스나 심지어 데모 현장에서도 상황이 잠잠해지면 여기저기 여남은 명씩 모여 앉아 ‘도리짓고땡’ 판을 벌였는데 특히 각 경찰서 대원들이 모이는 공공건물이나 중앙청(현재 광화문) 잔디밭처럼 넓은 휴식처에서는 시장 난전처럼 노름판이 즐비했다. 지나다니는 시민들이나 버스 승객들은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리기 일쑤였다.
  꾼들은 노름을 하면서도 언제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올지 몰라 조바심이 났다. 한참 끗발이 오를 때 상황이 벌어지면 기분을 잡치곤 했다. 더구나 돈을 잃고 열이 달아오른 상태에서 상황이 벌어지면 노름판을 깨지게 한 학생들이 원망스러웠다.
  “새끼들, 하필 돈 깨질 때 튀어나올 게 뭐람.”
  분통이 터졌다. 차라리 돈을 땄을 때 튀어나오면 좋았을 텐데 하필 돈을 털린 판에, 그것도 빌린 돈으로 겨우 노 잡을 차례인데 그 복구할 기회를 빼앗는 해코지가 괘씸했다. 돈을 잃은 대원들은 군사독재가 어떻든, 민주주의가 어떻든, 대일 굴욕외교가 어떻든, 학원탄압이 어떻든, 언론탄압이 어떻든 그까짓 게 문제가 아니었다. 또 데모대들이 길거리를 휩쓸든 말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든 말든,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낙원을 건설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높은 사람들처럼 데모 잘못 막았다고 추궁당할 리도 없었다. 다만 돈을 잃을 때는 잠잠하다가 끗발이 오를 참에 교문을 박차고 나오는 데모대들의 약올리는 해코지가 부아를 긁을 뿐이었다. 돌이 날아오고, 최루탄을 쏘아대고, 앰뷸런스에 부상자가 실려가고, 그렇게 분탕질을 칠 때도 꾼들의 마음은 어서 대기 상태로 돌아가 다시 화투판을 벌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아주 해산해 버려 상황이 끝나도 섭섭했다. 상황이 끝나면 그날의 노름도 끝나게 되어 돈을 잃은 입장에서는 복구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노름꾼에게 가장 바람직한 데모 형태는 학생들이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서 버티는 교내시위였다. 학생들이 교내에서 해질녘까지 버티면 진압대원들은 온 종일 ‘도리짓고땡’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노름하기에 가장 적합한 양질의 상황은 데모 없는 대기상태였다. 상황이 벌어질 듯싶어 아침부터 잔뜩 대기하고 있는데 교문을 박차고 나오기는커녕 교내시위도 없는 평온한 침묵상태, 그날은 온종일 판을 벌일 수 있어 좋았다. 그런 경우가 가장 빈번한 곳이 서울대학교 문리대였다. 문리대에서는 큰 데모판이 벌어질듯하면서도 온 종일 조용히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출동 병력은 소방서 대기실 다다미바닥에 퍼질러앉아 노름판을 벌였다. 동숭동 거리(지금의 마로니에 거리) 문리대 앞에는 공교롭게도 소방서가 있어 진압부대원들은 바로 데모 소굴 코앞에서 편안히 앉아 노름을 즐길 수 있었다. 그처럼 문리대 상황이야말로 양질의 노름판을 제공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중에서도 데모꾼이 가장 많은 문리대는 데모를 위해 생겨난 학교 같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법대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데모가 심하지만 문리대만큼 드세지는 못했다.
  “법대놈들은 함부로 까불다간 판검사 못해먹으니까 조심해야지.”
  홍기평이 개평 뜯은 돈을 세어보며 한 말이었다. 동대문서 직원인 그는 자기 관내에 지원 나온 영등포경찰서 직원인 나와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홍기평은 경찰간부인 친형의 권유로 경찰관이 되었는데 누구보다 내 처지를 이해하는 친구였다. 
  “법대생들이야 체면치레 땜에 나오겠지.”
  나로서는 법대생 하면 점잖게 고시공부나 하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