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1회)

충남시대 2024. 4. 8. 12:55

차마 악마를 죽이지 못하다


1966. 9. 9

  바쁜 직무를 빼놓고는 덤덤한 하루였다. 우연히 헌 잡지에서  ‘종합연구 유머’를 읽었다.
  “유머는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서는 맛을 모른다. 부른 배가 빨리 꺼지게 하는 소화제가 유머이다.”
  “유머는 웃음이 당장 탁 터져 나오는 것은 좋지 않고, 씹을수록 은근히 웃음이 솟구치는 것을 제격으로 친다.”
  “영어를 생판 모르는 친구가 미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영어를 몰라 불편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나는 괜찮지만 미국 사람들이 불편하겠지.”
  “유머 이야기는 미국식이요 희극적인 이야기는 영국식이며 기지에 넘친 이야기는 불란서식이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며 유머리스트인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무덤을 보면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신시내티의 무덤에선 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의 무덤에선 나무가 800야드나 무럭무럭 자란다.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죽기 전에 마신 물 때문이다.”「미시시피강의 생활」에서.
  “안식일 날 고기를 너무 많이 잡지 마라. 그렇지만 찬스를 놓쳐서 하느님이 모처럼 내리시는 선물을 거절해선 안 된다.” 미국 문학작품 중 가장 비극적이고 악마주의적인『백경』에서.
  자연스러운 유머보다 과장이 강한 게 중국 풍자다. 똥차를 꿀차라고 하여 자신이 부닥친 곤경을 미화시켜 웃는 능력.
 『춘희』작가인 小 듀마가 아버지 大 듀마를 헐뜯는 사람에게, “아버지는 비유하자면 큰 강과 같은 존재랍니다. 그 속에다는 소변을 보는 작가도 있답니다.”

  확실히 유머는 즐겁다. 인생을 풍부하게 한다. 내 유머러스한 체질이 자랑스럽다. 그 유머러스한 천성 때문에 나는 이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창조주는 의미 없는 기도보다 영웅의 눈물을 더 깊이 느끼실 거다. 


1966. 9. 15

  충무로4가파출소로 발령.
  중앙극장에서 임검차 <마담엑스>를 감상했다. 
  "암놈이 어찌 새끼를 위해 싸우지 않겠는가. 정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관대할 때가 있다."
  파출소 옆에 사는 이봉조악단의 조 부부가 가끔 나를 위로한다. 밤에 커피도 끓여다 준다. 


1966. 9. 17

  .... 보는 것은 logos적인 것이며 듣는 것은 phatos적인 것이다. 즉 눈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이며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종홍 교수의 <보는 것과 듣는 것>이란 논문에서’ 

  새벽 1시. 어저께 통금위반으로 적발해서 넘긴 오리엔탈 나이트클럽 댄서가 내 용고 동창이며 이봉조악단의 기타맨으로 활동하는 처임을 알았다. 예쁘고 직업에 비해 정숙하고 인정이 많다. 가끔 커피도 끓여다 준다.


1966. 9. 23

  너무나 악몽 같은 시간이다. 어젯밤 소장과 함께 술을 마시고 밤늦게 금호동 셋방에 돌아왔는데 방안이 캄캄하여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손을 더듬거려 침대 모서리를 만지는데 물컹하고 무엇이 손에 잡혔다. 꼬꼬(태호)의 목덜미였다. 서둘러 스위치를 올렸으나 불이 켜지지 않았다. 다시 더듬었더니 무엇이 꿈틀거린다. 그때 안집 아줌마가 언질을 준다. 술이 취해서 세간을 때려 부수더라고. 불을 켜고 보니 방안은 쓰레기장이나 진배없었다. 토사물이 태호의 몸에 묻어 있고, 술이 이불을 적시고, 술병 깨진 유리 조각이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시트에도 토사물이 흥건하고, 테호는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 떨고 있었을 자식을 생각하니 당장 목을 조르고 싶었다. 나는 우선 웃음을 지으며 태호를 안심시켰다. 두려워 울지도 못했을 어린 자식이 가여울 뿐이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오 신이시여!

  사카린 사건으로 국회에서는 김두한 의원이 정 총리를 비롯한 각부장관이 앉아있는 자리에 인분을 퍼부어 세상이 난리 속이다.


1966. 9. 28

  내일이면 추석명절이다. 어릴 적 명절 추억이 멍든 가슴속에 차분히 스며든다. 내 어릴 적 명절은 때때옷 한번 입어본 적이 없다. 무명옷이나마 물감을 드려지어 입으면 자랑하고파 십리길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1966. 10. 7

  시골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손자가 보고 싶어 올라오셨단다. 그런데 그녀는 그처럼 착한 시아버지에게 왜 왔냐고 욕을 퍼댄다. 죽일 년! 천벌을 받을 년! 나는 시끄러워질까 봐 참을 수밖에 없다.


1966. 10. 20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그녀 형부를 만났다. 그는 처제의 버릇을 고쳐줄 테니 자기 집에 와 살라고 사정했다. 자기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라고 설득한다. 그는 내가 사표 내고 자기네 회사에 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상무든, 전무든, 사장이든,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어서 사표를 내도록 해. 저년이 지랄 뗘는 것도 자네가 파면당해서 내게 오는 걸 노리고 하는 짓일 거네.”
  “사표 내고 도망칠 겁니다.”
  그게 내 대답이었다.

  내일 미국 존슨 대통령 경호를 나가야 하는데 마음이 착잡해 걱정이다. 진짜 사표 낸 기분이다.


1966. 10. 13

  태호는 로케트 타고 달나라에서 지구 아빠에게 전화하지?
  그으래.
  여보세요. 여기는 달나라, 지구 아빠 들으세요 하지?
  응.
  그놈은 신이 나서 사기로 만든 고양이 입에 입을 대고 지껄인다. 
  여보쉐요. 아빠 있쉐요?


1966. 11. 15

  영화 <황야의 무법자>를 관람했다. 자신의 널을 메고 황야를 걸어가는 사나이. 이미 사라진 사랑의 무덤을 찾아 그곳에서 죽고 싶어 하는 .......  


1966. 11 24

  어제는 첫눈이 내렸다. 예년보다 20일 앞당겨서 추위가 왔다는 관상대 발표다. 빙점하의 이 추위에 사랑하는 내 아들은 지금 고이 자고 있을지, 아니면 이불을 발로 차서 배를 얼며 자지는 않을지, 자면서 오줌을 눴다고 에미년이 날바닥에 재우지는 않는지, 귀여운 궁둥이가 그년의 억센 손에 두들겨 맞지는 않는지, 며칠간 보지 못한 내 꼬꼬가 그리워 참을 수 없다. 새벽에는 근무를 결략해서라도 잠시 그놈을 보고 와야겠다.

  드디어 내 아들을 그 악마에게서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놈을 데리고 시골에 가야겠다.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지 말자!
  그녀가 술을 마시고 술병을 깨고, 그 시퍼런 유리조각이 깔린 침대와 방바닥에 더럽게 토해낸 오물. 침대 모서리에 부들부들 떨며 뜬눈으로 꾸부린 채 누워 있는 내 꼬꼬의 모습. 아빠가 안 돌아왔다면 얼마나 공포에 시달렸겠나.
  나는 그놈을 껴안고 한쪽 구석을 치우고 누워 있다. 그때 침과 거품을 부글거리는 그녀의 입과 코를 종이 쪽으로 막았어도 나는 충분히 살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