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 장소가 아니라 역적모의 장소
“우선 자네는 좋은 상관들을 만난 줄 알게. 그거에 대한 보답은 충실히 근무하는 것뿐이네. 이번 징계에서 자네 부인의 처사가 어떻든 간에 마땅히 중징계를 당해야 했네. 함부로 살아온 자네의 자업자득이지. 특히 업무가 거칠면서도 예민한 구석이 있는 우리 경찰공무원에게는 공동으로 엮어나가야 할 창조적인 운명이 별도로 있는 법이네. 거기에 충실히 동참했기 때문에 자네는 상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지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는 아직 서투른 것 같네. 세상살이에는 양심과 뜻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힘든 함정이 많다는 걸 명심하게. 자네의 딱한 형편을 감안해서 훈방하기로 이미 합의를 보았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마쳐야 된다는 거네. 자네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공인의 신분으로서 어찌할 도리가 없네. 그 여자가 패악해진 것도 자네의 태도 때문 아닌가.”
갑자기 분위기가 굳어졌다. 혼인신고란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 분위기의 숨통을 수사과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열어주었다.
“혼인신고? 때려쳐! 밥맛없는 여자와 어떻게 살겠어. 품윈가 지랄인가 땜에 징계 먹으면 아주 옷 벗어버리지 뭐. 나도 이젠 이 생활이 지겹네.”
“저 사람부터 징계해야겠군.”
위원장이 수사과장에게 농담을 던졌다. 본래 징계위원회 분위기는 엄숙하기 마련인데 이번 내 문제만은 이미 다 내막을 알고 오히려 내 입장을 변호해 주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다른 대책이 없을까요?”
정보과장이 위원장에게 차선책을 주문해 보았다.
“이러면 어떨까. 저어....”
수사과장에게 묘안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보는 앞에서 의원면직으로 사표를 쓰게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데로 전출시킨다?”
“비밀을 어떻게 보장하죠?”
입회감찰의 말이었다.
“경무과에서 당분간 인사기록 카드를 빼버리지 뭐.”
“나중에 사실이 들통나면 누가 책임지게? 근거서류는 경찰청과 내무부에도 있는데.”
위원장이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찰측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표를 내겠습니다. 상사님들께 누를 끼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여자에게 자식을 맡길 수도 없습니다.”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나자 눈앞이 캄캄했다. 부모와 테호의 퀭한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동안 배곯음에 너무 지쳐온 나였다.
“하여튼 호적에 올리게 하면 이 사람은 영영 불행해집니다. 그러니 수사과장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과장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징계 장소가 아니라 역적모의 장소군. 정보과장이 계속 시나리오를 써봐.”
경비과장이 농담조로 받았다.
“아까 수사과장 말대로 여자가 보는 앞에서 사표를 쓰고 동해안 같은 지방으로 전출시키면 될 것 같애. 그런 데서 삼사 년만 감쪽같이 숨어 지내면 그동안 무슨 결판이 나고 말 거야. 원래 바람기가 있는 여자라 얼마 못 가서 사내가 생길 테고, 오히려 이쪽을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가 올지도 몰라. 그렇게 감이 무르익으면 살짝 따먹기만 하면 돼. 그리고 자네는 책을 좋아하니까 한가한 바닷가에서 공부나 하지 뭐.”
“맞아, 세월이 약이지.”
“한 인생의 행과 불행이 달린 문젠데 머리를 짜보자구. 이런 음모는 죄가 아니니까.”
위원장은 아무 말 없이 위원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업무와 인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한 매듭을 바라는 감찰측에서는 머리만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책임소재가 따른다는 눈치였다. 그 눈치에 정보과장이 못을 박았다.
“모든 책임을 지고 내가 직접 인사기록카드를 뺄 테니 감찰은 사표나 받아둬. 그리고 시골보다는 부산 정도의 도시로 전출시킵시다.”
“하여튼 회의일지나 작성해 두지.”
위원장은 감찰 쪽에 한마디를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느닷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실컷 울어. 울고 나서 기분이 개운해지거든 나하고 소주나 마시자구.”
위원들 중 맨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정보과장이 격정에 들먹이는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다음날 감찰측은 애나를 입회시켜 놓고 내 사표를 받았다. 감찰반장이 애나에게 사표를 꼭 받아야 되냐고 되물었지만 그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도장을 찍게.”
감찰이 애나의 표정을 살피며 내 앞으로 사직서를 내밀었다. 나는 도장을 찍었다.
“이제 사표를 수리한 이상 당신들끼리 알아서 해요”
내게서 서명날인을 받은 감찰이 그녀에게 들려준 마지막 말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기뻤다. 이제 자식을 악마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게 되었다.
1967. 3. 9
부모님을 부여 사돈집에 맡기고 내일은 부산으로 떠나야 한다. 상사들의 배려로 몰래 부산에 가지만 언제 그년이 사실을 알고 진정할지 모를 일이었다. 불안했다. 대전에서 열차를 타려고 부여에서 대전행 버스를 탔다.
1967. 3. 21
서울을 떠났다. 짐가방을 두 개 장만해서 급사를 데리고 택시를 잡았다. 퇴계로를 지날 때 눈시울이 뜨거웠다. 언제 다시 서울에 올라올지.
부산에 도착했다. 본역을 다시 지을 동안 부산진역이 종착역이다. 부산이 무척 변했다. 초량역은 철거된다고 한다.
경남경찰청장 동생인 친구를 만나 내 근무지를 의논했다. 동부서에서 제일 좋다는 자성대(범일동) 파출소로 발령을 받았다. 헌무를 만나 그의 아내와 함께 남포동과 동래온천을 누비며 다녔다.
이튿날에는 경찰청장 댁에서 사모님과 점심을 먹었다. 부산은 서울보다 준법정신이 약하다. 모두 거칠었다. 근무자세도 투박하다. 손찌검도 험악하다.
유엔군묘지 방문 차 부산에 내려온 홀트 호주 수상 경호에 나갔다. 비가 내렸다.
1967. 4. 10
부산으로 전출된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나고 있다. 자성대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하자 우선 숙소가 문제였다. 파출소에서 자고 지낸 지 20여 일이 지나자 여관에서 공짜로 방 하나를 내주겠다는 청이 들어왔다. 깡패들에게 시달리는 여관에서 경찰관을 재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투숙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한밤중에 불량배 대여섯 명이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주인에게 금품을 요구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신분을 밝혔다. 하지만 불량배들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되레 공격자세를 취했다.
“보소, 당신이 머요? 함부로 까불다가 큰코다치오. 내 말 아요? 잔말 말고 고이 잠이나 자소.”
주먹들은 눈알을 빙빙 돌렸다. 나는 당장 팔을 비틀어 수갑을 채우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이라면 “이 새끼들 모두 밧줄로 옭기 전에 어서 꺼져!” 하고 엄포라도 놓겠는데 섣불리 손댔다가는 창피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서울에서는 경찰관신분을 밝히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떼거지로 몰려 있다가도 슬슬 길을 열어주기 마련인데 부산 깡패는 감각이 무뎠다.
“나 자성대파출소에 새로 부임한 직원야. 말 안 들으면 내일 혼날 줄 알아.”
나는 상대방이 성깔을 세우지 않을 만큼의 감정조절로 한번 슬쩍 밀어보았다. 그러자 주먹들은 관할 직원이란 말에 차마 덤비지는 못하고 “씨팔, 더러버서!” 하고 욕을 퍼부으며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이봐요. 명색이 경찰관이, 그것도 내 관할 불량배에게 수모를 당했는데 참으라고? 그래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단속하겠소.”
나는 불쾌감을 누르지 못하고 따졌다. 객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근무라 웬만한 텃세쯤은 진작에 각오했지만 참을 일이 아니었다.
“꼭 조져야 직성이 풀리겠능교?”
“당연하잖소. 나 개인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잖소. 우리 전체의 자존심이 달려 있는 문젠데, 불량배조차 말을 안 듣는 판에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소?”
“좋시더, 이따 함께 나가봅시더. 개새끼들, 어느 노므 짓이노. 메가지를 확 뿌지삘라.”
저녁 무렵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직원은 수갑을 뒤에 꿰차고 앞장을 섰다. 나는 뒤를 따랐다. 불량배들의 소굴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인지 직원은 시장 골목과 대선소주 옆 창고 등 몇 군데를 뒤지다가 문현동 로터리에 있는 당구장을 찾아갔다. 당구장은 이층에 있었다. 입구에 서서 구석을 살피던 직원은 내게 눈짓을 했다. 구석 당구대에서 서너 놈이 공을 치고 있는데 때깔이 곱지 않은 상판들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곁에 가자마자 한 놈씩 덜미를 챘다. 주먹들은 순순히 나무의자에 앉았다.
“느그들 우리 직원한테 까불었다제? 어느 노므 짓이고? 쌔끼!”
직원은 앞뒤 안 가리고 구두 뒤축으로 한 놈의 발등부터 찍었다. 슬리퍼를 꿰찬 발등이 금방 벌겋게 부어올랐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서울 같으면 어림없는 짓이었다. 펜으로 얽어야지 구두 뒤축으로 뭉갰다가는 폭행으로 고소당하기 십상이었다.
“느그들 안 불끼가? 잉? 새끼!”
이번에는 구둣발로 다른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즈는 잘 모르니더.”
“모른다꼬? 늬 참말이제 잉?”
직원의 구둣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어느 부위가 요절날 판이었다. 그때 발등 찍힌 놈이 “데려올끼요, 데려올끼요”하고 손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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