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2회)

충남시대 2024. 4. 16. 09:18

가짜 사직서를 받은 징계위원회


 

징계위원회는 회의실에서 열렸다. 위원은 각 과의 과장이 맡았고 위원장은 부서장급인 경무과장(당시에는 경무계장. 경감)이 맡았다. 위원장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보안과장, 경비과장, 수사과장, 정보과장이 앉고 한 쪽에 입회감찰과 용하가 앉았다. 징계사유는 경찰관 품위실추와 서은지와의 통간 건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징계위원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징계받을 사람을 두둔하는 징계는 처음이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징계는 징계이니만큼 절차를 밟아야 되므로 자네도 성의껏 답변해 주기 바라네.”

회의가 열리기 전에 위원장이 분위기를 잡았다. 다른 위원들은 어서 회의를 끝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뻔한 일인데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수사과장이 싱거운 말을 던졌다. 그러자 위원장이 입회감찰에게 회의 진행을 지시했다. 감찰이 진정사항에 대한 조사내용을 읽고 내 진술이 이어졌다. 내 진술은 차분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모처럼 만에 가슴이 뻥 뚫리도록 토해내고 싶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또한 아무리 악처라 한들 제 치부를 드러내는 노릇일진대 어찌 떳떳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서 냉정하지 못하고 그런 여자의 유혹에 빠져든 자신만을 책망하며 아픈 세월을 참아왔습니다마는.....”

유혹이라니?”

징계위원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캐물었다. 징계사유와 하등 관계없는 질문인데도 나는 그녀와 만나게 된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진술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산에서 라디오 외판원 생활을 하던 시기의 상황부터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그녀를 만나게 된 동기, 즉 오늘 징계를 받게 된 근본 원인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째서 애를 뱄는가?”
내 진술을 듣고 난 위원장이 내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나는 내 모순된 논리에 일순 당황했다. 애정 없는 여자를 임신시키다니.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침묵을 보안과장이 깼다.

도덕적인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자네 심정부터가 아예 아내로 여기지 않았는데 어느 여잔들 악을 쓰지 않겠는가. 그리고 애정이 없는데도 통정해 왔다면 깨끗이 헤어지든지 운명으로 여기고 살든지 해야 될 것 아닌가?”

자자 골치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징계사유만 밝히도록 하지. 여기는 도덕강습소가 아니니까.”

수사과장이 어서 단락을 짓고 싶다는 듯 회의진행을 재촉했다. 그러자 위원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참작할 사유가 될 것 같아 묻겠는데, 자네 처와 헤어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뭐지?”

나는 말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직속상관인 정보과장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사회 통념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패악한 일이어서 이 사람이 말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여자가 사무실에 찾아와 부린 행패를 보고 유추할 수 있었죠. 간단히 말해서 손주가 보고 싶어 시골에서 올라온 시어머니에게 술 취한 며느리가 물바가지를 씌웠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시아버지가 손자를 안으면 머슴살이한 더러운 손으로 애를 만지지 말라고 소리쳤다는 거야…….”

회의실에 무거운 적막이 쌓였다. 위원들은 말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데서 온 일시적인 정신분열현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어쨌나?”

수사과장이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참았습니다.”

자네 아주 못난 사내구먼. 그런 걸 그냥 놔둬?”

그 여자가 술에 취해서 잘 때 간단히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4만 경찰의 명예에 먹칠을 할까 봐 차마 목을 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겨우 말을 마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내 입장을 옹호하던 수사과장과 정보과장은 숫제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둔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난 일은 그렇다 치고 다음 진정사유는 뭐지?”

경비과장이 바쁘다며 회의 진행을 재촉했다. 아까 회의 벽두에 감찰 측에서 개요를 설명한 상정 안건은 남편의 가정 소홀 문제와 서은지와의 통간문제였는데 가정소홀은 경찰 업무가 대개 그러하듯 한창 시위가 무성할 때라 징계 논란의 가치조차 없는 사유였고 나머지 통간 문제가 이제부터 논의될 안건이었다.

두 번째 진정서에는 현직 경찰관이 빨갱이 딸과 통간 중이라고 씌어 있는데 감찰조사 결과 혼인빙자는 무혐의로 드러났지만 자네의 마지막 진술을 들어보기로 하지.”

위원장이 내 시선을 피한 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위원님들께서 아시다시피 서은지와 만나게 된 것은 그녀의 자살미수사건을 제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서은지는 제 애를 돌봐주러 들렀을 뿐이지 절대 불륜관계는 없었습니다.”

또 정을 통했음 어때.”

수사과장이 농담조의 말을 꺼내자 잠시 회의장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데 자네 처가 집요하게 파면을 요구하는 저의가 뭔가?”

수사과장이 이번에는 애나의 의도를 캐물었다.

한마디로 처갓집 덕을 보며 살라는 압박이었습니다.”

그거야 고마운 일 아닌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실토하기가 뭐하니 내용을 잘 아는 내가 대신 설명하죠.”

정보과장이 대신 말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잔 형사는 죽어도 그 여자와 평생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만나게 된 동기도 그렇거니와 애를 갖게 된 것도 어쩌다 보니 임신하게 되었고 올가미에 걸려든 형국이 된 거죠. 그렇다고 노부모를 모시고 어린 것까지 딸린 데다, 댕동 불알만 찬 형편이어서 함부로 사표를 낼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여자측에서는 잔 형사를 온전히 자기 식구로 옭아매기 위해서 처갓집 그늘 속에 묶어두자는 거고, 잔 형사는 아무 때고 헤어질 속셈이니 그건 싫다 그거군.”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형부 되는 사람이 혁명주체세력으로 큰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은 그 여자와 사는 조건이라면 황금방석도 싫다는 거야.”

정이나 그렇다면 이번 처리 문제가 심각한데…….”

이번에는 보안과장이 끼어들었다.

심각할 것도 없어.”

정보과장이 보안과장의 말을 받아넘기며 동정론을 폈다.

다른 위원님들이 모두 동정적이어서 참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이 사람을 징계에 회부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잔 형사는 솔직하고 의리 있고 유능한 직원입니다. 그동안 정보형사로서의 실적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징계 결과를 결정해 놓은 마당에 재론할 필요가 있습니까? 모두 시간 낭비죠.”

알았소, 정보과장은 너무 열 올리지 마쇼. 우리가 부하 잡아먹는 귀신이 아니니까.”

웃음 띤 얼굴로 분위기를 눙친 위원장은 나를 바라보며 나무라듯 결론을 내렸다.

우선 자네는 좋은 상관들을 만난 줄 알게. 그거에 대한 보답은 충실히 근무하는 것뿐이네. 이번 징계에서 자네 부인의 처사가 어떻든 간에 마땅히 중징계를 당해야 했네. 함부로 살아온 자네의 자업자득이지. 공무원에게는, 특히 업무가 거칠면서도 예민한 구석이 있는 우리 경찰에는 공동으로 엮어나가야 할 창조적인 운명이 별도로 있는 법이네. 거기에 충실히 동참했기 때문에 자네는 상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지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는 아직 서투른 것 같네. 세상살이에는 양심과 뜻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힘든 함정이 많다는 걸 명심하게. 자네의 딱한 형편을 감안해서 훈방하기로 이미 합의를 보았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마쳐야 된다는 거네. 자네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공인의 신분으로서 어찌할 도리가 없네. 사실 여자측에서도 그걸 요구할 자격이 있네. 그 여자가 패악해진 것도 자네의 태도 때문 아닌가.”

갑자기 분위기가 굳어졌다. 혼인신고란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런 분위기의 숨통을 수사과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열어주었다.

혼인신고, 때려치워. 밥맛없는 여자와 어떻게 살겠어. 품윈가 지랄인가 땜에 징계 먹으면 아주 옷 벗어버리지 뭐. 나도 이젠 이 생활이 지겹네.”

저 사람부터 징계해야겠군.”

위원장이 수사과장에게 농담을 던졌다. 본래 징계위원회 분위기는 엄숙하기 마련인데 이번 내 문제만은 이미 다 내막을 알고 오히려 내 입장을 변호해 주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나는 상관들의 그런 배려가 눈물겨웠다.

다른 대책이 없을까요?”

정보과장이 위원장에게 차선책을 주문해 보았다.

이러면 어떨까. 저어.....

수사과장에게 묘안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사표처리를 하고 몰래 다른 데로 전출시킨다?”

비밀을 어떻게 보장하죠?”

입회감찰측의 말이었다.

경무과에서 당분간 인사기록 카드를 빼버리지 뭐.”

나중에 사실이 들통나면 누가 책임지게? 근거서류는 다른 상급 관청에도 있는데.”

위원장이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찰측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표를 내겠습니다. 상사님들께 누를 끼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여자에게 자식을 맡길 수도 없습니다.”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나자 눈앞이 캄캄했다. 부모와 태호의 퀭한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동안 배곯음에 너무 지쳐온 나였다.

하여튼 호적에 올리게 하면 이 사람은 영영 불행해집니다. 그러니 수사과장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과장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징계 장소가 아니라 역적모의 장소군. 정보과장이 계속 시나리오를 써봐.”

경비과장이 농담조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