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진포구 난동사건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김 하사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윽고 초소병들이 김 하사와 달려왔을 때 초소병들은 숨이 차 있었다.
“정조준 사격을 하려다 공포를 쐈어요. 수류탄을 던질까도 했죠.”
달빛에 비친 물체가 틀림없이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경솔하고 위험천만한 짓을 후회했다. 책임감도 크다는 걸 깨달았다. 김 하사는 우리가 작업하는 바로 뒤편 20m 거리에 참호가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1968. 5. 16
파도가 높아서 출항을 금지시켰다. 모든 주민은 술로 하루를 보낸다. 여자들만이 놀지 않고 파도에 밀려온 미역을 줍는다.
1968. 5. 24
무기고 숙직실 상량식을 갖았다. 행우(멍게)와 해삼을 준비하고 문어를 삶았다. 향토예비군 소대장이 재배를 하고 종이를 실에 꿰어 대들보에 매달았다. 참석자 모두 실컷 술을 마셨다.
나무가 있다. 그 줄기를 존재의 의지태(意志態)라고 하자. 봄에 새싹이 돋아 가을에 지는 각각의 잎을 우리들 일회적 인생이라고 하자. 나는 그렇게라도 영생하고 싶었다. 줄기는 영생하는 존재다.
1968. 5. 25
머구리(잠수부)는 일본 말로 머구루라고 한단다. 허가상으로는 미역철에만 해저에서 작업하게 되어 있으나 사실은 해삼, 멍게, 문어, 성게 등 해물을 채취하고 있다. 선박 역시 머구리배가 별도로 있어 5,6명의 선원이 교대로 펌프질을 해서 해저에서 작업하는 머구리에게 공기를 공급해 준다. 머리에 쓰는 투구를 후크라고 하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탄산가스를 배출시킨다. 그런데 깊이 들어가면 압축이 커져서 하체는 꽉 조이고 상체에만 공기가 통하게 되어 있어 자칫하면 스베리(쥐)가 생기게 된다. 어제 밤에도 한 머구리에게 스베리가 생겨 밤새 물속에서 몸을 풀어주었다. 자칫하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고 한다. 몸을 푸는 데도 하루나 일주일 정도 계속 운동으로 풀어야 한다. 그때마다 온 선원들이 교대로 펌프질을 해준다.
신고를 받은 내가 보드를 타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캄캄한 바다에서 선원들이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하고 머구리는 몸 풀이를 하고 있었다. 갑판에는 선주 집에서 준비해 온 소주병과 달걀과 밤참이 놓여 있었다. 나는 뱃멀미가 나서 육지로 나와 선주 집에 갔더니 여기저기서 부산했다. 술에 취한 어부들 중에 한 동료 머구리는 "어째서 머구리가 됐냐."며 울면서 신세타령을 한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1968. 5. 28
현직 경찰관 중에서 활동적인 젊은 직원을 뽑아 전투경찰대가 조직되었다. 나도 오늘 206 전투경찰대로 발령이 났다. 각 도에 중대 단위의 부대가 하나씩 창설되었다고 한다. 내일 춘천 본국으로 영전하게 되었지만 앞 못 보는 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입장이어서 강릉에 나가 박수균 경찰서장에게 부탁해서 도로 진리에 머물기로 했다.
어촌 총대회의에서 강력한 어선 통제와 국가적인 사안에 대해 강연했다.
1968. 6. 16
청와대습격사건과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을 겪게 되자 경찰이 담당했던 해안 경비를 육군이 맞게 되었는데 진리포구사건은 전국 해안을 따라 철조망이 쳐지기 직전에 터졌다.
당시 내 직함은 3가지였다. 어민들은 공식 직함인 임검소장으로 칭했고, 군인들은 206전투경찰대 편제상 명칭인 분대장으로 칭했고, 일반인들은 속칭인 대장으로 칭했다. 분대장의 전투복장은 칼빈, 잭나이프, 무전기, 쌍안경, 나침판 등이지만 평상시는 권총과 잭나이프만 챙겼다.
자정 무렵이었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무기고를 경비하던 향토예비군 근무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군인들에게 총기를 빼앗겼다고 보고했다.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보나 마나 군인 복장으로 위장한 무장공비가 틀림없었다. 나는 즉시 권총, 잭나이프, 무전기만 챙겨 무기고 쪽으로 달려갔다. 무기고 앞 통로를 차단하고 있던 바리케이트는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다. 근처에서 “하나 둘, 하나 둘” 하고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두컴컴한 마을 복판 도로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주민 20여 명에게 토끼뜀을 시키고 있었다. 군인복장으로 위장한 무장공비가 틀림없었다. 벌써 무장공비가 부락을 점령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이상한 용기가 솟구쳤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야?”
나는 앞에 총을 한 사병에게 지휘관을 물었다. 사병은 저쪽에 서 있는 중위를 가리켰다. 안면이 있는 중대 부관이어서 우선 마음이 놓였다. 무장공비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중위 계급장을 단 부관은 내가 플래시 불을 비추며 사유를 따지자 불 꺼! 하며 위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가 큰 소리로 사안의 중대성을 알리고 어서 무기부터 반환하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자꾸 플래시 불을 끄라며 거만을 떨었다. 나는 기합 받는 주민들에게 어서 해산하라고 소리치고 나서 부관에게 따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군이나 경찰이나 주민을 위해 여기에 주둔해 있는데. 무슨 법적 근거로 예비군의 무기를 빼앗고 주민을 기합 주는 거요?”
그래도 부관은 무기를 돌려주지 않고 거만을 떨었다. 나는 부득이 강릉 전투경찰본대로 무전을 쳤다. 강릉에서도 무전으로 답신이 왔다. “끝까지 무기고를 사수하라. 금방 출발하겠다.” 내가 부관을 설득하는 동안 예비군 소대장은 망루에 올라 비상 사이렌을 울렸다. 그리고 뛰쳐나온 향토예비군들에게 내 허락도 없이 총을 나눠주었다. 사이렌을 분지 20여 분만에 기적적으로 60여 명의 예비군이 출동했다. 어부들인 예비군은 거의가 술에 취해 자다가 출동했는데 놀라운 성과였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실탄을 장전한 현역과 빈총을 든 예비군이 대치하여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벌어졌다. 더구나 술이 덜 깬 예비군들이라 그들은 겁 없이 “영차 영차”를 연호했다. 나는 우선 예비군과 현역 양 측에 침착하라고 소리쳤다.
"예비군은 실탄이 없으니 걱정 말고 절대 쏘지 마라! 발사하면 큰 사고가 터진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총을 내리라고 명령하고 내게 무기를 돌려주었다. 그때 사천 쪽 뚝길에 불빛이 보였다. 비포장인데도 차량의 속도가 빨랐다. 금방 현장에 도착한 지프에서 정보과장과 방첩대장이 중대장을 데리고 내렸다. 내가 대략 상황 개요를 설명하자 무기고 앞마당에 집결한 예비군과 주민들에게 중대장이 공개 사과했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중대장 권 대위는 나와 술도 마신 사이였다. 나는 그 늙은 장교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관 탓에 처벌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로 부임해 온 부관은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해’ 해변에서 밤바람을 쐬고 있는 주민들을 잡아다 기합을 줬던 것이다. 그는 며칠 전 내 사무실인 무기고를 찾아와 거만한 말투로 무슨 서류를 내놓으라는 둥 월권을 행사했지만 나는 중대장 권 대위를 생각해서 참고 “우리 협조해서 어민생활을 도웁시다.”라고 다독거렸다. 그래도 그가 위압적인 자세를 거두지 않자 “중대장에게 연락할까?” 하고 그의 기를 꺾어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나는 주민 대표 5명을 데리고 경찰서 서장실을 찾아가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 자리에는 군 연대장(대령)도 동석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서장에게 나를 칭찬하며 워낙 똑똑한 분이라 일을 잘 치렀노라고 야단들이었다. 서장과 연대장이 주민을 설득하고 사과하는 선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서장과 전투경찰대장은 내 예비군 교육실적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술에 취해 잠자던 향토예비군 60명이 20분 만에 출동했다는 데 대단한 성과라고 칭찬했다. 그만큼 창설 초기의 예비군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군대의 사과와 경찰의 설득으로 서장실의 분위기는 밝아졌다. 그런데 사건은 나도 모르는 사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주민 대표들이 몰래 강릉 주재 기자실을 찾아가 사건을 폭로했던 것이다. 이튿날 여러 신문에 진리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신문 타이틀에는 임검소장인 내가 무장한 군인들과 격투 끝에 탈취당한 무기를 회수했다고 보도되었다. 내 공로에 대한 보도 투성이었다. 나는 민망했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 측에서는 서장과 군 측에서는 연대장까지만 알고 무마하기로 한 사건이 중앙 일간지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으니 일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서울 6관구사령부, 홍천 11사단본부, 헌병대, CID 등에서 계속 나를 찾아와 위로하고 사실을 캐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사건이 침소봉대되었노라고 설득하기에 바빴다. 이미 부관과 소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홍천으로 압송되었고 직속상관인 중대장 대대장도 징계를 당했다고 한다.
언론에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렇게 추정할 수 있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자 일반인에게 무기를 지급하면 여기저기에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기우가 전국에 만연했다. 마침 대구 어느 극장에서 수류탄 투척사건이 터진 때여서 진리 사건은 특종감이 되었다. 어느 고급장교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청와대 각하께서는 사건보다 20분 동안에 60명의 예비군이 잠을 자다가 출동했다는 데에 더 관심이 크심니다.”
보통군법회의에서 검찰관이 피해조서를 받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부관도 자기의 경비업무에 충실하다 보니 실수를 저질렀고 소위는 불찰을 알면서도 부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검찰관은 참작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후 한 달쯤 지나 제대복을 입은 청년이 임검소로 나를 찾아왔다. 알고 보니 부관과 함께 구속당했던 소위였다. 불명예제대로 풀려난 그는 내게 인사차 찾아왔던 것이다.
“말씀을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1968. 6. 21
생활이 곤궁한 조씨네 아줌마가 찾아와 울먹인다. 세무서 직원이 밀주 단속을 나와 걸렸다고 한다. 나는 세무서 직원에게 잘 봐주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튿날 마을에는 내가 세무서 직원과 함께 마을을 뒤졌다고 소문이 나고 양조장에서는 내가 밀주 단속을 못하게 했다고 진정하겠다며 야단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 인정과 직무태만의 차이는?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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