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3회)

충남시대 2024. 7. 9. 14:25

첫사랑의 빨간 손수건과 편지를 불사르다


  .....예술은 구속에서 살고 자유에서 죽는다.            -앙드레 지드
  .....자기 자신의 소질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신념이다.          -에머슨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죽음에 지나친 명예를 주는 것이다.       -그린
  .....이 세상에서 고독하게 될 권리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가입니다.    -까뮈
 
  학아, 나(잎Leaf)는 바로 영원(나무Tree)이란 것에 붙어있다고 했다. 잎이 시든다 해도 그 Tree는 또 Leaf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고 똑같은 내(Leaf)가 또 생겨난다고 했다. 그것은 Leaf나 Tree나 결국은 궁극의 입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위안이며 희망의 모태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노력은 바로 그 입자의 해명에 대한 실험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神이기도 한 그 입자의 표상행위인 것이다. 그 행위는 우리의 의무이며 가치인 것이다. 우리는 그걸 자각해야 한다. 그 자각하는 행위는 고통이기에 New Moral인 것이다.
  나는 내 행동(예술)의 지침을 구할 것 같다.

1968. 9. 3

  서울에서 한·일과학기술 장관 회의 개최하다.
  이보 안드리치의『드리나강의 다리』를 읽다.『드리나강의 다리』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낼만한 지혜와 본능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두렵고 부조리에 차 있다.

1968. 9. 7

  헤르만 헤세의『나르시스와 골드문트Nargiss and Goldmund』와『유리구슬 놀이』를 읽다.
  밖에는 때늦은 궂은비가 내리고 있다. 짙은 어둠이 그 빗줄기를 세차게 빨아들이고 있다. 나는 헤르만 헤세를 읽으며 행복을 느낀다.
  또 화두로 삼아온 존재存在를 생각한다. 나는 나무줄기의 존재는 원과 같이 시작과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둥근 금반지를 만들어 끼웠다. 순수존재純粹存在와 무無는 동일하다는 헤겔Hegel의 말에 동감한다.

1968. 9. 8

  해묵은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첫사랑 혜연과 주고받은 편지를 발견했다. 신주처럼 모셔온 그 편지들을 꺼내 과감히 정리하고 그녀가 준 빨간 손수건과 편지를 불살랐다. 혜연이 좀 더 지혜로운 여자라면 나를 위대하게 이끌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고교시절부터 그처럼 사랑해온 혜연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84살인 지금 혜연이 내게 준 손수건과 편지를 태운 그 어리석은 짓이 가슴을 칠 만큼 후회스러웠다. 손수건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받았던가! 아아, 그 손수건과 편지가 있었다면! 그것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로 잔아박물관에 모셔졌으리라!
  눈보라 치는 밤에 월명산 능선 바위틈에서 왜 포옹하지 못했던가! 그처럼 순결했던 내 사랑인데.....
  Barnett의 <우주와 이인슈타인>을 읽다. 나는 훌륭한 이론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런 방향으로의 지도와 뒷받침할 환경이 없었다.
  인간이 진실로 알고 있는 세계는 자기를 위하여 감각이 창조한 세계일 따름이다. 감각이 옮기는 인상, 기억력이 남기는 인상, 이런 것들을 모두 지워버린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철학자 Hegel이 말한 바 <순수존재와 무와는 동일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1968. 9. 9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을 끝냈다. 너무 그것에 밀착됐고 단 그저 해야만 됐기에 오래 걸렸다.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종이를 더럽혔으리라. 나는 헷세를 읽으면서 그의 철학적 돌입이 현실에 갖는 의지를 찾아보려 했으나.....
  헷세는 이 책 속에서 이 세계의 온갖 현실적이고 충동적이며, 창조적이고, 환상적인 본질이 모성에 근원 하며 모성에 증언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베아트리체라고 불렀던 소녀를 자주 만났다. 나는 이제는 조금도 동요를 느끼지 않았으나 언제나 부드러운 일치감과 감정에 넘친 예감을 느꼈었다. 즉 너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네 자신이 아니고 너의 그림이다. 그러니까 너는 내 운명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이었다.”
                                                                                             -『데미안』에서
  .....나 자신에게로 도달하기 위해 일생동안 걸었던 발걸음만이 나에게 흥미가 있다. 그것의 마력이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모든 부드럽고 사랑스런 아버지의 품속), 모든 아름다운 휴식처와 행복의 섬과 낙원을 나는 저 멀리 광채 속에 놓아두고 다시 그곳을 발 딛기를 바라지 않는다.”                                                                                      -『데미안』에서

“시든 이 편지”(We liken Blett)
모든 꽃은 과일이 될 것을,
모든 아침은 밤이 될 것을 원한다.
영원이란 지상에는 없다.
변화와 도피밖에는
찬란한 여름조차도
가을과 조락凋落을 느끼기를 원한다.
멎거라 이파리여, 고요히!
바람이 너를 데려가려고 하면.
너의 놀이를 하고 반항하지 말아라.
조용히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라,
너를 꺾는 바람이
너를 집에 불어 가도록.

1968. 9. 10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에 들어간다.
  .....善과 美를 지향하는 인간적 노력의 총 결속. 거친 우주의 모든 힘을 차츰 지배하고 활용하여 지상에 선과 미를 실현하려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신.
  ....오직 인간 속에 인간에 의하여 존재하며 인간을 통하여 스스로 창조되고 완성하는 신.
  .....기도에 의함이 아니라 지상에 선미를 실현하려는 모든 인간적 노력에 의하여 그 자신도 인간과 더불어 완성되는 神.
  이러한 지드의 神은, 나에게는 신이 아니라 하나의 고통이다. 지드의 신은, 배움의 입장으로 볼 때 커다란 제도이다. 그 제도는 바로 New Moral이며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제도는 고통을 탐하는 자들이 만들어야 한다.

1968. 9. 11

  “문화는 결코 전면적으로 의식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들이 자각할 수 있는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화에는 속해 있습니다. 문화는 계획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든 계획의 무의식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또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 T.S 엘리엇의「문화와 정치에 대한 각서」에서

1968. 9. 12

  저녁밥을 너무 많이 먹어 횡계에 나갔다. 소화도 시키기 겸 천천히 어둠이 깔린 가로수 밑을 걸어갔다. 야채를 싣고 서울로 향하는 트럭의 먼지가 매캐하게 코속을 후빈다. 이런 곳에 그런 먼지는 질색이다. 이 조용한 원시적인 고지에는 오직 정막과 우울과 공포만이 마땅하다. 횡계지서에 들렀더니 마침 술과 개고기가 있다. 숙직실에서 고기를 먹었다. 오랜만에 대하는 고기, 나는 사정없이 먹어댔다. 막사에 돌아오니 기분이 한결 가볍다.

  윌리엄 포크너Faulkener의『가문 9월』을 읽었다. 
  .....슬픔과 무無 중에서 하나를 택하자면 슬픔을 택하겠다.             - 윌리엄 포크너

  옛날부터의 진리-다시 말해서 사랑과 명예, 연민, 프라이드, 동정, 그리고 희생이 없이는 어떤 이야기도 하루살이의 운명을 면치 못합니다. 이 진리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작가는 공연히 헛수고할 뿐입니다.... 인간은 유독 불멸의 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을 가졌고 동정과 희생과 인내가 가능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불멸의 것입니다. 작가의 의무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 쓰는 것입니다.                                               - 포크너의 노벨문학상수상 기념연설

1968. 9. 16

  20세기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읽다.
  “그러한 사상으로선 중국은 보다 더 호전적인 외세를 막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당한 경고다. 사실 우리나라가 그렇다. 또 세계 정치철학이 그러하다. 나는 외치고 싶다. 모든 인류는 핵을 우주정복에 바치라고.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전일성全一性에 앞서 각 민족은 民族性이라는 옹고집을 버리고 위대한 세계국민이 되기 위한 자질향상에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리고 당분간(과도기)은 일체의 불의와 침략과 비자유성의 위협에서 대결할 힘을 가져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큰 골치덩이의 하나는 우리가 어떤 것을 독단적으로 믿는 버릇입니다. 세상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허다하고 지각 있는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너무 자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견을 가질 때 자신의 의견에 대한 약간의 회의를 함께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처음에 정치가가 되려고 했다. 지루하게 글을 쓴다거나 더더구나 철학은 내 인간다운 욕망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령 인간에게 천성 같은 게 있어서 내 그 소질에 순응하여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해보겠다 한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정치까지 포함해서 그것들을 생각했을 때는 30을 넘는 나이였고 그때는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세 가지 중 가장 가능성 있는 정치를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누구누구는 20세 때에, 아니 그전에 시를 쓰고 베스트셀러인 소설을 쓰고 학설을 내세웠다는 것을 읽고 내 나이에 학문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읽은 적이 없을 때 나는 너무나 쓰라려서 내 의식을 잃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가난보다도 오직 나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고 그거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