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2회)

충남시대 2024. 7. 2. 14:39

헤밍웨이 엽총자살과 케네디 대통령 애도성명


1968. 7. 4

  주문진임검소장 근무를 마치고 진리포구로 귀임했다. 주문진항 근무는 참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오징어 꽁치 성어기인 요즘 300여 척의 기범선(택택이)과 외항선을 임검하면서 어선 통제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원칙대로 해안을 봉쇄하자니 영세 어민의 피해가 크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자니 간첩침투 방지에 소홀하게 되니 적절한 묘책이 강구하는 데에 힘이 들었다. 어선 한 척에 승선 신고 인원은 8명뿐인데 20여 명이 타고 그중에는 미성년자도 끼어 있다. 나는 살기 위한 그들의 부정행위를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해상경비정이 임검소 앞에 정박 중이다. 정장의 업무가 애매하다.(해안경찰 창설되기 전)
  주문진항은 동해의 중요 어업기지이다. 수백 척의 어선과 산더미 같은 생선과 술 취한 선원들, 그리고 미소 짓는 술집 여자들. 그런 항구의 전체 생계를 좌지우지하는 임검소 소장의 업무는 어쩜 화려할지 모른다. 더구나 일반경찰은 미온적이어서 전투경찰을 배치한 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것은 몇 푼을 벌기 위해 밤을 새워 항해하는 늙은 선원들에 대한 연민이다. 물론 불법 출항을 묵인해 달라며 임검소로 돈봉투나 고기를 상자째 들고 오는 얄미운 부자 선주들을 동정할 수는 없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진리포구를 다시 지망한 것이다.
  Will Durant의「철학 이야기」를 읽었다. 그 책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모든 과학은 철학으로 시작하여 예술로 마치며, 가설에 기원하여 완성으로 유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비록 우리를 부유케는 못할지라도 자유롭게는 할 것이다.


1968. 7. 13

  새벽 4시부터 선박 출항 카드에 도장을 찍고 아침을 먹었다. 낮에는 해녀들을 모아놓고 작전지역과 신원파악에 대한 교양을 시켰다.
  어제는 전 어민을 소집하여 어선단 조직, 반공계몽, 기타 출입항에 대한 유의사항을 지시했다.
  달밤, 나는 육군 11사단 해안초소가 있는 높다란 언덕 위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내 존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나를 흥분시킨다.
  지서장과 방파제에서 가재미회로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실수할 뻔했다.


1968. 7. 26

  어제는 문화공보부가 개청 되었다.
  가톨릭 의대생 및 의사들 20여 명과 뱃놀이를 했다. 그들 남녀 학생들의 무료봉사에 대한 내 보답이었다. 그들 중에는 용고 부중 출신 후배도 있었다. 의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살을 쭉쭉 쨀 때의 기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 학래에게서 편지가 왔다. 주고받은 편지가 몇 통인지 모른다. 그는 프라그마티즘의 우월성을 적었다. 생명=시간=돈, 이것이 미국 사회란다.
  1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다.


1968. 8. 9

  향군 표준방위촌 심사에서 진리 9소대가 명주군 대표로 강원도 심사에 올랐다. 여기에서 우승하면 중앙에 간다. 1등은 대통령 하사금 500만 원을 받는다. 비가 내리는데도 사이렌을 불어 전원을 집합시키고 교양수업을 지도했다.


1968. 8. 14

  깊은 밤. 입초 근무자 2명을 집에 보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조용한 시간을 갖고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경비실에서 책상 앞에 앉았다. 밖에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모기장 속에 들어 있는데도 왠지 불안하다. 칼빈소총 등 무기 100정. 모기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무장공비가 나를 철학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1968. 8. 16

  훼밍웨이가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보도가 화제다.『노인과 바다』등으로 195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자살은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나도 훗날 그에 대한 작품론과 작가론을 쓴 적이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특별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은 애도 성명 전문이다.
세계적인 위대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국민의 정서와 태도에 미국민 누구도 따르기 힘든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거성처럼 문학계에 출현한 이후,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주창자로서 이 세대를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으며,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문학은 물론 인간의 사고방식을 변형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작가이다. 오늘날 미국은 예술의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비록 그는 전 세계를 무대 삼아 위대한 세계시민으로 살아왔지만, 그가 명성을 떨치며 자신의 예술을 창조해 낸 바로 그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을 시작하였듯이 그 종지부도 미국에서 찍고 말았다.
  방파제 쪽에서 무너지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태초에도 저런 굉음을 냈을 것이다.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50억 년을 살았어도 그 긴긴 기간을 순간으로 계산할 것이다.


1968. 8. 17

  <현대문학> 9월호의 “불후성의 문학”이란 제하의 글을 읽고 흥분했다.
  ..... 문학이란 결국 영속하는 것에 대한 공감을 누리자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不朽 」의 정신과 마음을 형상화하는 창조작업이 아닐 수 없다. 영원은 일체의 무인 것이며 또한 무의 영속성을 공감하고 누리는 것이「不朽」일진대 문학은 오직 무를 형상화하는 비탄의 창조행위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 무를 어루만지고 호흡하는 정신과 마음이 문학창조의 세계에서 영속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리라.
  “이치에 맞게 살다 즐겁게 죽어라.”
  안토니우스의 이 잠언은 나로선 상당한 의미를 제시해 준다.


1968. 8. 21

  한국과 통일아랍이 문화협정을 체결했다.

  G.S.프레이져는 현대소설에서는 리얼리즘, 심리학, 실험을 들었다. 인간이 부정당한 문학을 현대문학이라 부를 순 없다. 
  문제제기의 문학이란 R.M.알베레스에 의하면 엄격히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인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몰두하는 것을 뜻한다. 


1968. 8. 28

  나뭇잎과 대존재大存在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존재의 표상에 불과하다. 나의 있고 없음은 무의지적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그게 바로 고통苦痛이다.
  방구석에 놓인 경비 전화기에서 가르륵 가르륵 잡음이 날 때마다 예민해진 신경은 옆에 뉘어 놓은 M2 CAL에 손을 대게 한다. 생명애착. 혼자 잠도 안 오는데 브래지어만 입은 여자가 곁에 있다면, 그게 M2 CAL보다 더 방위력이 강할까?


1968. 8. 29

  깊은 밤,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에 存在가 있었다.
  그 존재란 바로 神을 말한다. 
  모든 사물은 존재의 표상이다. ’나‘라는 것, 그것은 존재의 한 증명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다. 개별적으로는 나의 가치란 없다. 다만 존재의 현상으로서만  가치가 주어진다. 그 인간의 존재자체는 윤리다. 무생물도 역시 존재(神)의 현상(懸象)이다.

  .....이미 망치는 들고야 만 것. 그걸 휘두르는데 스스로의 의무를 부여해 보자. 남들이 뭐 래든, 심지어 snobism파든 mammonism파든 알바 아니다. 하지만 과로해선 안 되겠지. 지금의 나처럼 병들기 쉬우니가 말이다. 내 병은 야릇한 병이다. 멍청하게 서 있는 병이니까.
                                                                   - 베트남 심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를 내외 도전 속에 기능을 발휘시키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독재(Absolution)란 강한 정부가 성공할 때보다도 약한 정부가 실패했을 경우에 초래되기 쉽다.                                                                               -쉬래징거 교수

  방구석에 놓인 경비 전화기에서 가르륵 가르륵 잡음이 날 때마다 예민한 신경은 옆에 뉘어 놓은 M2 CAL에 손을 대게 하는구나. 생명애착. 혼자 잠도 안 오는데 브라자만 입은 여자가 곁에 있다면, 그게 M2 CAL보다 더 방위력이 강할까?

1968. 9. 02

  지금부터는 깊이 생각하고 일기를 써야겠다.
  후에 <Ether> New Korea지를 만들어야겠다.
  의지 역시 일종의 고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