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관광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 경호경비
1968. 9. 21
오늘 아프리카 튀니지에 한국총영사관을 설치했다.
강릉경찰서에 있는 전투경찰대 본부에 나가 봉급과 급식비를 타왔다.
어제는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 경찰청(치안국)에서 휴대용 혼다 발전기 취급법을 배워왔다. 전투경찰대는 오지 업무가 많아 자가발전이 필요했다. 천체과학관에서 관람도 하고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장에서 원자력 전시장도 둘러보았다.
외국의 한 경제학자는 오늘의 한국을 마치 산업혁명기를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1968. 9. 27
1954년도 화학부문 노벨수상자인 폴링Pauling 박사의『no more war!』(내일의 원자전)를 읽었다.
“만약 핵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인간의 돌연변이는 두 배, 세 배, 내지 십 배까지도 증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은 우리의 세대를 이어받을 인류를 근절시킬 수도 있겠고 또는 유전형질군을 크게 변화시켜 현재의 인간과는 아주 다른 외모나 성품을 가진 인간으로 변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968. 9. 28
나는 유그릿드 기하학의 어느 공식만큼이나 귀중한 공식을 유도해 냈다. 내 나이age를 a라 할 때 내 현실 나이 A는 “A=a-10” 인 것이다. 내 나이 33세면 A=33-10, 즉 23세인 것이다. 33세에 대입, 39세에 박사학위!
1968. 10. 8
쓸쓸한 추석날 책을 읽다가 기분도 그렇고, 주문진에 다녀오려고 어선을 탔다. 사천까지 걸어가기가 싫어 태풍주의보가 발효 중이지만 주문진 방파제로 피난하는 택택이를 탄 것이다. 아침만 해도 볕이 따갑던 날씨는 금방 구름이 끼고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수평선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배가 축깡을 빠져나가자 공포에 질렸지만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배를 돌리자고 말할 수 없었다. 점점 파도가 거세졌다. 1톤 남짓한 배는 파도의 능선에 기어올랐다가는 기우뚱하고 몇 미터를 주저앉는다.
“저런 파도는 위험치 않아요. 꺾는 파도가 위험하죠. 그건 겨울철에 부는 바람이죠.”
내 질린 얼굴을 보며 선주가 웃으며 안심시켰다. 하지만 가끔 큰 파도에 휘말릴 때면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공포감이 몸을 옥죄었다. 침착하게 키만 놀리는 선주가 존경스럽다. 그는 높은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키를 우측으로 돌려 파도의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 파도를 넘게 했다. 그때마다 배는 성난 말이 앞발을 들고 소리치듯 허공에 선수가 붕 떴다가 철벅하고 내려앉는다. 그리고 옆으로 기우뚱하고 기울어 간을 녹였다. 나는 배 안에 있는 해녀의 뒤웅박 같은 유리 부체浮體 끈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 = 나의 시체>란 내 사유가 그 죽음 앞에서는 초라했다.
1968. 10. 9
버스를 타고 가는데, 여자의 스커트 자락 밖으로 슈미즈 자락이 내비친다. 그런데 자극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녀의 허벅지가 메말랐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여자의 다리는 무릎에서 사타구니 쪽으로 들어갈수록 가늘어진다?
어느 나라에서는 추물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 콘테스트가 진짜라면 모두 얼굴에 상처를 낼 것이다. 미는 상대적이고 그 개념은 설정돼 있지 않다.
1968. 10. 27
태풍에 조난당한 시체 5구가 파도에 떠밀려왔다. 조난 선박 승선자들이다. 불쌍하다. 나는 온종일 시체를 처리하며 좀 더 정답게 시체를 만진다. 시체로 변한 현상의 바뀜, 그것도 하나의 존재 형식이다. 그런데 왜 차디찬 그 시체의 감촉에서 섬뜩한 무섬기를 느꼈을까?
포목이 도착하자 나는 시체를 염하도록 시키고 모래톱에 정렬했다.
1968. 11. 1
경포관광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 경호경비를 마치고 돌아왔다.
또 시체 한 구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현장 임검을 마치고 기분을 돌리려고 술을 마셨다. 시체를 발견한 선주는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시체를 모래톱에 묻고 나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과일과 술을 차려놓고 절을 올렸다. 그래야 재수가 있다는 것이다. 미신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항상 위험에 노출된 그들에게 과연 누가 미신이라고 따지겠는가.
1968. 11. 2
공산주의 이데오로기로서 그들이 부르조아적 인간성을 자유를 인위적으로 변혁하려고 하나 그것은 항구적인 인간성은 아니다. 변혁된 인간성이란『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말하는 인간도 아니며 야수도 아닌 괴상한 잡종일지 모른다.
밖에는 달빛이 환하다. 나는 홀로 서서 먼바다를 바라본다. 흐릿하게 말려오는 파도가 마치 유령 같다. 태백산맥 역시 마찬가지다 희미한 능선이 산맥의 유령 같다. 달빛은 멀쩡한 산과 바다를 유령으로 만드는 무서운 악마다.
1968. 11. 5
휴전선과 동서 해안에 무장공비 출몰로 초비상 상태다. 나는 무기고에 10명의 향토예비군 경비병을 세우고 완전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진리 1. 2구 대원과 방동, 산대월리 대원도 내가 지휘하게 되었다.
비를 맞으며 스피커로 방송했다.
“배 위에 놓아둔 노와 키를 집으로 가져가시오.”
그리고 향군 근무자를 데리고 먼저 바닷가로 나가 군인들에게 향군 근무처를 주지시키고 민간인들의 일을 도왔다. 희미한 바다, 그 속에 무엇이 아물거리는 것만 같다. 상부에서는 수없이 메모지가 날아와 속속 상황을 알려준다.
1968. 11. 7
며칠이 지나면 먼 데로 떠난다. 떠나기 전 아버지 산소에 들러보았다.
순간과 행복. 파도소리만이 출렁대는 달빛 환한 어촌의 밤. 한적하고 말끔한 방에서 판자 쪽으로 얽어맨 책상일망정 구미에 맞는 책이 놓이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미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이것이 인생의 보람이라면 인간은 확실히 행복한 존재다. 금방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이 순간의 행복은 사실이다. 엉겁에 비하여 인생이 순간이라면 인간의 그 순간적 존재 역시 의미 있는 것이다.
1968. 11. 10
미국 제37대 대통령에 닉슨이 당선되었다. 월맹(베트남) 전국에 폭격이 중지 되었다.
요즘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만큼 바쁘다. 무장공비의 소탕작전을 위해 4개 소대의 전 향군을 통솔하여 4곳에 주야간 경비를 세우고 감독하는 데에 지쳤다. 그것 말고도 수시로 집합 점검을 하는 데다 일인당 M1은 실탄 24발씩, KAL은 30발식 지급하고 있으니 오발사고 등 자체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게다가 선박임검. 더구나 양미리 철이라 외지 선박까지 들어와 포구가 더욱 번다해졌다.
어제는 어디서 공비가 몇 명 출현하고, 몇 명을 사살, 아군 피해 몇 명, 또 오늘은 어디서 몇 명이 출현 등등 쉴 새 없이 적정이 하달되고 있다. 군·경·예비군 합동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공비를 완전 소탕하기에는 아직 멀다.
1968. 11. 22
대간첩작전으로 연일 주야로 경비근무다. 나는 실탄 90발과 수류탄 한 개를 가슴에 차고 일상 업무에 임하고 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그 복장으로 상 앞에 앉는다.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아픈 기관지염도 강릉에서 약을 사 올 시간이 없어 치료를 못하고 있다. 빈틈없는 해안선 경비가 삶의 전부다.
1968. 11. 26
겨울철에 훈훈한 바람이 부니 지루함이 느껴진다. 겨울에는 추워야 제 맛인 것 같다. 밖에는 바람이 거세게 분다. 방송으로 태풍주의보를 알리고 출항을 중지시켰다. 요즘은 술을 자주 마시는 셈이다. 어민들과 어울려 사니 어쩔 수 없다.
오후에는 예비군이 근무할 참호를 파게하고 집에 돌아와 어제 사온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었다.
1968. 12. 11
또 무장공비가 일가족을 참살했다. 심지어 “공산당이 싫어요.” 했다고 10살짜리의 입을 찢어 죽였다. 공산주의가 뭐길래 그처럼 악랄할까.
작전으로 분주한 아빠의 꽁무니를 어린 자식이 따라다닌다. 어린 자식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는 셈이다. 어저께는 무기고에서 놀다가 벽에 세워둔 총이 넘어지면서 그놈의 이마에 부딪쳐 피가 났다.
놈멜 원수가 자기 자식에게 마지막 해준 키스처럼 나도 그렇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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