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6회)

충남시대 2024. 8. 6. 14:35

주문진임검소 사건과 삼척 무장공비 침투


1968년 11월 21일부터는 전국적으로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시민증, 도민증이 주민등록증으로 통일된 것이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주문진임검소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졌다. 밤이 깊었을 때였다. 국군 복장을 한 괴한 4명이 임검소에 들어와 시비를 걸었다.
  “경찰관 근무 태도가 이게 뭐야!”
육군 대위 복장의 괴한이 잠시 누워 쉬는 염 순경에게 소리쳤다. 염 순경은 근무수칙을 어긴 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군인이 감독자처럼 굴었다는 데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그 장교와 따지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였다. 하사관 차림의 괴한이 칼을 목에 댔다. 이내 염 순경의 등에는 별 모양의 칼자국이 찍혔다. 염 순경의 숨이 끊어지자 괴한들은 이번에는 열댓 살 된 임검소 사환을 밧줄로 묶어 결박해 두고 주민등록증을 탈취해서 방파제 쪽으로 도주했다. 사환은 뒤로 묶인 끈을 손목에 피가 나도록 시멘트벽 모서리에 비벼댔다. 그가 끈을 풀고 주문진지서에 알리고 나서야 비상이 걸리고 경찰과 예비군이 방파제 쪽으로 출동했다. 까만 바다 저쪽에 무엇이 어른거렸다. 토벌대는 일제히 그쪽에 대고 사격했다. 그쪽에서도 응사해 왔다. 피아간에 사격이 계속되다가 한참 뒤에 저쪽에서 사격을 멈추었다. 바다는 조용했다.
  이튿날 방파제 너머 바다에는 고무보트 한 척만이 떠 있을 뿐 괴한들의 행적은 묘연했다. 우선 고무보트를 건져왔다. 보트에는 총구멍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구멍을 때우고 다섯 명 무게의 모래부대를 실었다. 그것을 도로 바다에 띄워놓고 방파제에서 사격을 해보았더니 보트는 한쪽으로 기울면서 모래부대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힌트를 얻은 강릉경찰서장은 잠수부들을 동원해서 바다 밑을 뒤졌다. 저인망어선 갑판에서는 잠수부에게 공기를 넣어주기 위한 펌프질이 한창이었다. 드디어 군인 복장을 한 시체 한 구를 바닷속에서 건져 올렸다. 이어서 네 구가 차례로 올라왔다. 무장간첩들이었다. 그들의 얼굴과 팔다리는 뼈만 남아 있었다. 옷으로 가려진 부분 말고는 모두 고기가 뜯어먹었다. 뼈에는 골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근처 어민들은 한때 골뱅이를 먹지 않았다.

1969. 4. 19

  거진임검소 근처로 넓은 방을 얻어 이사했다. 내 머리맡에는 늘 M2 칼빙과 30발의 실탄이 장전된 탄창이 놓여 있는데, 그런 방에 <유모레스크>의 선율이 흐르는 모순이 내 생활을 장식하고 있다. 며칠 전에 구입한 휴대용 전축의 조화랄까.

1969. 4. 21

  날씨가 풀리면서 어판장에는 물기가 말라갔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명태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한기魚閑期가 닥친 것이다. 술집 아가씨들도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 북적거리던 다방에도 빈자리가 늘어났다. 타지에서 온 어부들의 살림도 다시 궁핍해졌다. 손가락에 껴 있던 누런 금반지가 하나둘 사라지면서 전당포만 성업 중이었다. 농민들의 보릿고개처럼 일 년 중에서 어민이 가장 시달릴 때가 봄이었다. 꽁치, 오징어, 양미리, 명태가 계절에 맞춰 어획고를 올려줬지만 봄에는 ‘삼마이 그물’로 낚은 잡어뿐이었다. 그런 어한기인 봄철을 어민들은 ‘저인망어선’으로 바다 밑을 훑으며 연명해왔다. 일제시대부터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정부에서 출어를 일체 중지시켰다. 나는 선주와 선원들에게 저인망어선의 폐해를 계몽했다.
  “어족의 씨를 말리면 결국 여러분들 손햅니다. 화포(미역) 수확을 올리기 위해 바다에 바위를 실어다 넣는 판국인데, 길이가 칠 센티도 안 되는 치어까지 훑어먹으면 나중에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 굶어 죽습니다. 그러니 어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출어중지로 인한 피해는 너무 컸다. 미리 대책을 세워주지 않은 갑작스런 단속으로 어민들은 일터를 잃은 셈이었다. 북적거리던 어항에는 빈 배만 출렁이고 어판장에는 먼지만 풀풀 날렸다. 매일 빈 광주리를 끼고 어판장에 나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아낙들의 시선은 내 거동만 따라다녔다. 출항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초조한 눈빛들이었다. 고성군 기관장과 유지들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출항을 재촉했다. 모든 책임은 자기네들이 질 테니 출항카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졸랐다. 그들은 돈봉투를 들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집을 비우고 여관에서 잘 때도 있었다. 유지들은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고성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 줄 알죠? 대통령 사위 아뇨? 함 의원의 의중에는 주민의 소득증대뿐인데 이렇게 골탕먹이는 걸 알면 얼마나 화나겠소.”
  “내가 지금 골탕먹이는 겁니까?”
  “그게 아니고, 가령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럼, 나를 찾아올 게 아니고 함 의원께 부탁해서 하루 빨리 상부로부터 출어를 허용토록 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지난번 함 의원이 저를 찾아와 어민들의 편의를 부탁한 적이 있지만 노골적으로 출항을 부탁하진 못했잖아요. 내가 지금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어판장에서 출어를 갈망하는 아주머니들의 슬픈 눈빛입니다.”
  그 눈빛은 보리밥 한 덩이를 놓고 남편과 자식의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의 참담한 눈빛 그것이었다. 어머니 생각이 나자 아낙들에 대한 연민이 더욱 가슴을 쳤다. 날이 갈수록 어판장은 더 메말라갔다. 가난에 찌들어 풀어진 눈빛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며칠간이라도 출어를 시키자. 그 대가로 징계를 먹어도 좋고 구속을 당해도 좋다.
  “출항!”
  나는 직원들에게 큰소리로 지시했다. 직원들은 출항카드에 빵빵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불안감보다 되레 신이 났다. 참으로 이상한 용기였다. 갑자기 조용하던 항구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움직이고 배가 움직이고 바다가 출렁거렸다. 발동을 거는 사람, 어구를 챙기는 사람, 그들의 얼굴마다 웃음꽃이 피어났다.
  결과는 뻔했다. 신문과 방송에 터지고 검찰에서는 진상파악에 나섰다. 조사결과 검찰에서는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강원경찰청으로 불려가 감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나는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자의로 출항시킨 당사자로서 문책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강원경찰청에서도 동정적이었다.

1969. 4. 27
  
  양양군 남애포구임검소장으로 임시 발령을 받았다. 피신인 셈이었다. 내 양심을 믿어준 전투경찰대장과 고성경찰서장의 배려가 고마웠다. 고성군 유지들이 합동으로 찾아왔다.
  “고데구리(저인망어선)를 출항시켜주신 그 인정에 감사드립니다.”
  유지들은 위로금조로 3만 원을 내놓으며 빌렸다 갚았다는 영수증까지 써주었다. 끼니를 굶는 어민들을 위해 징계를 각오하고 며칠간 출항시켜준 내 순순한 마음의 대가였다. 하지만 나는 끝내 받지 않았다.

1969. 4. 29

  그동안 내 근무자세를 칭찬해 온 전투경찰대 대장에게 사표를 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지식인인 데다 청렴결백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내 사표를 반려하고 솟아날 구멍이 있다며 안심시켰다. 밤늦게 대장이 직접 지프를 몰고 함께 속초로 갔다. 중간에서 춘천 본국 경비과장을 만나 대장이 설명했다. 과장은 내게 자네 심정을 이해하니 근무나 잘하라고 타일렀다. 고성경찰서장도 검찰지시는 내가 처리할 테니 근무나 잘하라고 안심시켰다. 서장 역시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1969. 5. 3

  춘천 경찰국 감찰계로 불려갔다. 나는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춘천에서 2일간 보내고 고성과 강릉을 거쳐 택시로 속초 여관에 돌아왔다. HID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는 용고 동창 이성렬 대위와 동창인 이상일 결혼식장에서 만나 둘이 설악산으로 직행하여 술을 마시고 그곳 여관에서 잤다.

  감찰도 나를 동정해주고, 고성경찰서장의 노력으로 해경 간부만 2명 구속되고 나는 속초지검에서 입건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신문에는 내가 입건되었다고 보도되었다.

1969. 5. 20

  어제 해안을 철수해서 성산면 금산 솔밭에서 텐트를 치고 중대 모두 야영생활에 들어갔다.
  밤에 열등감에 사로잡힌 내 분대원 하나가 술에 취해 총기를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모두 대피했다. 분대장인 나만 그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어 총을 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처음에는 모두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소리치더니 비실비실 자조하다가 내게 총을 내주었다. 나는 그를 포옹해주었다. 그는 눈문을 흘렸다. 그런데 부副대장이 그 대원을 처벌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나는 화가 치밀어 싸우고 말았다. 그는 창설 초기의 임시 대장이었는데 탐욕이 유별난 지저분한 인간이었다.
  이튿날 술이 깬 그 대원을 보살펴주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평상시에도 그는 나를 무척 따르던 대원이었다. 어째서 신은 착한 인간들만 저렇게 만드는지.....

1969. 6. 6

  현충일 휴무. 금산 부대 옆 솔밭 마을에 방을 얻어 놓고 남애임검소에서 지내는 연자와 태호를 데려왔다. 금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매일 구보와 맹훈련으로 기진맥진 상태다. 나는 분대장으로 솔선수범하려니 더 고단했다. 오늘은 보현사까지 9키를 도보행진했다. 총과 무거운 배낭 등 완전 무장한 복장으로 먼 길을 걸으니 몸이 걸레가 되었다.

1969. 6. 7

  나에게는 무엇인가 빠진 게 있는 것 같다. 비현실적인 기질에 현실이 마찰을 빚으니 어쩔 수 없는 기현상인진 몰라도 하여튼 내 인격구조에는 한 개의 주춧돌이 빠진 게 틀림없다. 그것도 견고한 기둥 말이다. 인정 때문에 법法에 대들다니?

1969. 6. 8

  새벽 4시에 우리 206전투경찰대에 긴급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삼척에 공비가 출몰했다고 한다. 완전무장을 갖추고 4대의 트럭에 소대별로 분승해서 묵호 쪽으로 국도를 몇 시간 동안 달렸다. 북평지서에 도착하니 먼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자갈길을 달린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먼지투성이다. 우리 중대는 산속으로 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