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8회)

충남시대 2024. 8. 20. 14:04

막걸리 1되 값으로 산 아내


  “한 인간에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이글호에 함께 타고 있던 올드린도 곧 내려가 처음 본 달의 모습을 “장엄하고 황량한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이후 약 2시간 반 동안 달의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지진계와 레이저 반사경 등 여러 과학 장비를 설치하고 22kg의 달 암석과 토양 샘플도 채집했다. 이제 달과 지구와의 대화는 이루어졌다.
  아아! 달과 지구와의 대화라니! 생생한 목소리. 710만 개의 부속. 엄청난 우주곡예였다. 해설자의 말로는 태양의 수명은 최고 100억 년이란다. 태양의 핵반응으로 지구에서의 생물 존재 기간은 30억 년에서 40억 년이라고 한다. 그러니 인류는 앞으로 광속과 같은 속도로 수년이나 수백 년을 걸려 다른 천체로 이주해야 한다. 연료는 중수소를 이용하는 게 꿈이란다. 연료 혁명이 곧 공간 정복의 열쇠라고 한다. 연료 혁명으로 공간을 광의 속도로 10만 년이나 100만 년 걸릴 때 인간 60 평생은 너무 짧다. 광속으로 달리면 1억 킬로미터인 금성까지는 4분, 달까지는 1초 걸린다고 한다.
  “참 엉뚱한 분이네요.”
  효서가 말했다. 지난밤 초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라디오 앞에 앉아 밤을 꼬박 새우며 무엇을 일기장에 적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꼭 천문학에 미친 사람 같아요.”
  “그래서 나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 저 질퍽한 우주의 육감을 감상해 보라고. 아무리 요염한 여자도 저 우주만큼 색정을 유발하지 못해.”
  “무슨 말인진 몰라도 하여튼 별난 경찰관이네요.”
  “이런 산속까지 낯선 홀아비를 따라온 아가씨가 더 별나지.”
  “이제야 내게 관심을 갖는군요.”
  “그게 뭔 소리요?”
  “나를 별난 여자로 보신 것부터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죠. 하지만 우주만큼 사랑해주지 못할 바엔 그냥 놔두세요. 혼자 풀을 뜯어먹다가 배부르면 누워 자게요.”

1969. 7. 21

  아폴로 11호 달 착륙을 기념하여 우리 정부에서도 임시 휴무일로 정했다. 지금까지 계속 중계가 되고 있다. 아폴로 계획 책임자인 폰 브라운 박사는 인류의 불멸을 보증해주었다고 말했다.
  토인비는 “민족주의라는 시대착오적 고정관념을 청산할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1969. 7. 27

  효서가 내일 집에 가겠다고 한다. 순결한 여성이었다. 효서의 지성과 생활미가 아름답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녀는 강릉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장을 봐오기도 했다. 벌써 25일이 지났다. 달 착륙 중계를 밤새워 듣는 내 모습을 보고 "이상한 경찰관"이라고 말한 여자. 하루 종일 이부자리를 깨끗이 빨아 바느질까지 해놓은 여자!

1969. 7. 29

  효서가 떠나고 없으니 막사가 마냥 쓸쓸하다. 경포해수욕장으로 해서 강릉까지 전송해 준 것이 그나마 섭섭한 마음에 위로가 된다. 내가 붙잡았으면 떠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눈물을 흘리며 떠난 여자가 아닌가!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측우소에서는 호우주의보가 발효되었다. 빗줄기가 거세진다. 번개에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촛불을 켰다.

1969. 8. 4

  헤겔의『정신현상학』에 미쳐 있다. 황홀하다. 어려운 철학서지만 내 정신세계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아아 이런 생각만 하다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더없이 고요하고 황홀한 이 산정. 뒤란 도랑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흔들 뿐 무한한 정지가 나를 감싸고 있다. 완전히 나를 변장시킬 수도, 순수하게 죽일 수도 있는 이 거룩한 장소!

1969. 8. 17

  서화담의 철학사상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중고교 시절부터 허무에 빠져온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 즉 내가 죽는다 해도 아주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질량불변의법칙에 의해 내 몸은 미세먼지 같은 기체 형태로 우주 속에 편재해 있다가 어떤 意志(나는 그 의지를 意志態라고 명명)의 작용(聚散作用)에 의해 다시 내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思惟로 영생을 모색해왔다.

1969. 8. 27

  어느새 가을인가? 막사 안이지만 겉옷을 입고 책을 읽었다. 가을은 내게 사치다. 나는 무더운 여름날이 숫제 마음 편하다.
  프랑스 시인 페르스에 대해 읽었다. 밤에는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이 도시의 전등불처럼 밝다.

  슬픔과 無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슬픔을 택하겠다.            -포크너-
  언어는 산물(ergon)이 아니라 활동(energeia)이다.           - 흄 볼트-

1969. 9. 22

  월요일이다. 5일간 서울에 다녀왔다. 올 때는 KAL여객기를 타고 강릉공항에 도착했다. 공군시절 말고는 처음 여객기를 탄 셈이다. 그것도 신사복 차림이 아닌 전투경찰복장으로.
 청량리경찰서 다중범죄진압부대로 원정 간 206전경대 동료들의 강당 합숙생활을 보며 똑같은 대원인 내가 그들과 별다른 이방인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나는 깨끗한 막사에서 이방인임을 자부하고 있다.
  막사에 돌아와 보니 학래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서화담의 사상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내가 철학과를 택했다면 그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다. 다만 氣를 입자로 바꿔서 전개할 것이다. 내 입자의 결합이란 생각을 서화담은 취산聚散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1969. 11. 10

  양구경찰서로 발령이 났다. 휴전선을 낀 최전방 경찰서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경찰서 서열 1위인 서울중부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부산을 거쳐 가장 후진 양구경찰서까지 흘러왔으니 근무지 역시 드라마틱한 내 삶처럼 굴곡이 심하다. 군인 도시인 낯선 양수읍에서 무엇으로 절망감을 달랜단 말인가. 양구서는 읍내에 있는 상리파출소와 동면지서, 남면지서, 방산지서 등 4개의 지파출소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경찰서인 셈이다. 한반도의 배꼽인 양구군은 애초에 관할이 넓었지만 거의가 북한땅이 되었다.

1969. 12. 5

  군청에 근무하는 여직원 하나를 신원조회하게 되었다. 임시직에서 정식직원으로 발령내기 위한 수순이었다.
  다음은 장편『아내 찾아 10만 리』에서 발췌한 신원조회 장면과 그녀를 아내로 삼게 된 연애담의 한 장면이다.
  .....동료 직원인 추 형사가 반명함판 사진이 붙은 신원조회서를 내게 보여주었다. 군청 임시직 직원이 정식으로 임명을 받기 위해 제출한 신원조회 의뢰서였다.
  “어때? 삼삼하지?”
  나이는 스물, 얼굴이 예쁘장하고, 눈이 맑았다. 길에 금덩어리가 떨어져 있으면 몰래 숨기긴커녕 주인을 찾으려고 온종일 헤맬 여자 같다. 그녀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데다 코흘리개까지 꿰찬 홀아비 신세에 그만한 아가씨라면 하늘에서 별 따기다.
  “내가 맡지.”
  손을 내밀자 추 형사는 맨입으로는 안 된다며 조건을 걸었다.
  “막걸리 한 되 값이면 되겠어?”
  “막걸리 한 되면 3백 원인데, 좋아. 가난뱅이 짜봤자 똥뿐이 안 나올 테니. 그 대신 망신당하지 말라구.”
  조심해서 처리하라며 추 형사가 서류를 넘겨주었다. 본적, 전주소, 현주소, 생년월일, 학력, 경력 등 인적사항은 물론 가족사항, 재산관계, 성분, 성격, 심지어 혈액형까지 적혀 있으니 그 공문서는 중매쟁이나 다름없었다. 전화기 다이얼을 돌렸다.
  “군청 내무괍니다.”
  “여긴 양구서 정보관데, 여수니씨 부탁합니다.”
  “제가 여수닌데요.”
  “신원조회가 나와서.....”
  “네, 네,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하다뇨?”
  말을 좀 삐딱하게 받아보았다. 인생 풋내기여서 정보과니 신원조회니 하는 말에 목소리부터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아 네 전화 주신 게 고마워서요.”
  “고마울 건 없소. 내 업무니까.”
  “지금 찾아뵐까요?”
  “그러면 좋지.”
  이십 분쯤 지났을까, 수박색 투피스에 까만 롱부츠 차림의 아가씨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잔뜩 멋을 부린 모양인데 촌티가 역력했다. 
  “거기 앉아요.” 
  아가씨를 책상 앞 나무의자에 앉힌 다음 그녀가 내 머리 가르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몸을 비스듬히 틀어앉았다. 내 왼쪽 머리 가르마가 미국 영화배우 케리그란드의 가르마를 빼다박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온 터라 그녀에게 매력포인트를 보이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