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9회)

충남시대 2024. 9. 3. 13:18

하느님이나 들어 줄 수 있는 사업


 

  “이름은?”
  “여수니.”
  “생년월일?”
  “거기에 적혔을 걸요?”
  “여기에 적힌 걸 누가 몰라서 그래?”
  살짝 겁을 주었다. 담당형사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만약 의견 기재란에 자칫 용공(容共)에 대한 냄새라도 피우는 날이면 공무원 임용은 물 건너가게 마련이다. 친인척의 부역사실도 조사 대상이어서 한 마디만 잘못 쓰면 밥줄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아버지 직업은?”
  “정미소를 운영하세요.”
  “어머니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시죠.”
  “가정주부라고 간첩 아니란 법 있어?”
  “어머.”
  “농담요. 아가씨가 너무 착해 보여서.... 너무 착하면 바보스럽거든.”
  “형사님은 농담을 좋아하시나봐요.”
  “내가 바보여서 하는 소리오.”
  수니가 상냥하게 웃었다. 뭐니뭐니 해도 여자의 순박한 미소가 가장 큰 빽이다. 사내는 여자의 순박한 매력에 맥을 못 춘다. 
  “오빠는 초등학교 선생이고, 언니가 둘, 여동생이 넷. 딸부자네.”
  신원조회서의 가족 란을 훑어본 나는 사환을 불러 다방에 커피를 주문하라고 시켰다. 이런 대민관계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저쪽의 대접을 받게 마련인데 이쪽에서 대접을 하다니. 
  “아직 때 묻지 않은 분이라, 되도록 좋게 썼소.”
  볼펜을 내려놓으며 슬며시 수니의 마음을 건드려보았다.
  “고마워요.”
  수니가 연방 머리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 뻔한 인사치레에 마음이 허전했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숱한 요조숙녀를 다뤄봤지만 지금처럼 첫눈에 반하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가난한 홀아비 신세라 해도 여자에 대한 눈높이는 어느 남자보다 높았다. 그러니 웬만한 미모나 웬만한 재기가 아니면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촌뜨기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내가 실수한 모양이네. 자네한테 신원조회서를 넘겨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추 형사가 내 넋 빠진 꼴을 걱정했다. 
  “뭔 소리야, 그 여자 잊은 지 오래됐어.”
  “잊은 것 좋아하네. 그래서 뻔질나게 군청 출입하나? 극장 임검을 도맡아보고?”
  “왜 또 속을 긁어대는 거야?”
  “하기야 극장에서 만나면 일 추기가 수월하겠지. 신세진 형사가 옆에 앉으라는데 함부로 거절하겠어? 컴컴한 극장에서 손을 주무르며 속삭이면 작업이 빨라질 거구.”
  “애인이 있을 거야.”
  “어쭈, 나보고 애인이 있나 없나 수사해달라구?”
  “좁아터진 읍내서 수사고 자시고가 어딨어.”
  “그러니 맘 놓으라구. 아직은 없어 보이니까.”
  “정말로?”
  “걱정 마. 일주일 내로 고민을 해결해 줄 테니.”
  나는 추 형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였다.
  “무슨 수로?”
  “작전을 세워놨어.”
  “작전?”
  “육이오 전에는 여기가 북한땅이었잖아. 영감 서너 명을 막걸리로 궈삶았더니 술술 나오더군.”
  “그래서?”
  “외삼촌이 인민위원회에서 부역했다는 거야. 책임자로 있었다니까 아마 인민위원장을 지낸 것 같애.”
  “어어?”
  “자넨 직무를 유기한 셈이라구. 그 따위 신원조회가 어딨어. 아무리 여자한테 환장했기로서니 그런 실수를 저질러?”
  “그런데, 부역 사실이 진짜라면 왜 요시찰인명부(要視察人名簿)에 없지?”
  “이제야 눈치챘군. 여기는 수복지구라 부역이랄 수 없어. 그러니 부역에 신경 쓰지 말고 그걸 핑계 삼아서 자네 소원이나 풀어봐. 수니 씨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빌미잖아. 직장을 버릴 테냐 홀애비를 택할 테냐.”
  “백 번 천 번 직장을 버리겠지. 귀한 정미소 집 셋째 딸이 애 딸린 홀애비를 택하겠어?”
  “이거 장난이 아니군. 우리 불쌍한 홀애비가 완전히 돌았어. 홀애비한테 선뜻 다가올 리 없을 테고, 이러면 어떨까? 생떼를 써보면? 당신을 봐준 죄로 사표를 냈으니 나를 책임져라.”
  “그건 깡패짓이고.... 진짜 사표를 쓸까?”
  “사표 좋아하네. 집도절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밥통을 던져? 하긴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면 기회가 생길지 몰라. 그리되면 장인은 방아 찧고 사위는 쌀가마 져나르고, 죽이 척척 맞겠네.”
  “장가만 들 수 있다면야 머슴이 문제겠는가.”
  “어쭈, 차라리 수갑을 채워서 서울로 끌고가지 그래.”
  “정이나 안 되면 그 수밖에 없지.”
  “어렵쇼. 이 사람 눈동자 보니 정말 일내겠네.”
  군인극장, 이름이 너무 노골적이다. 군인보다 거의가 민간인 관람객인데, 몽둥이는 설득에 우선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극장 임검석에 앉아있는데 수니가 다가와 야살을 떨었다.
  “영화 보러 왔는데 끝나면 달구경해요.”
  아부할 여자가 아닌데 왜 이러지? 추 형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저토록 태도가 돌변했을까? 외삼촌 부역 사실로 엄포를 놨다 해도 갑자기 저럴 수 있을까? 극장을 나와 파로호 둑길에 이르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캐물었다.
  “추 형사가 뭐랩디까?”
  “추 형사님이 시켰다는 걸 어떻게 아세요? 추 형사님은 제가 자진해서 접근한 걸로 하랬는데.....”
  “수니 씨를 꼬시려고 미리 짠 작전이었소.”
  “그럼 여기 파로호에 데려온 것도 각본대론가요?”
  “물론이죠. 지금 고백하려는 말도 각본에 있는 대사고요. 수니 씨 사랑해요.”
  수니가 고개를 돌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달빛이 묻은 그녀의 목덜미가 복사꽃처럼 고와 보였다. 
  “친구가 쓸데없는 말을 했을 테니 오해 말아요. 보나마나 추 형사가 이런 말을 했을 거요. 어서 잔 형사를 만나 키스해 줘요. 안 그러면 그자가 당신 외삼촌의 부역사실을 털어놓을 텐데 공무원 임용은 물 건너가요. 그자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 아세요? 서울에서도 못된 짓만 하다가 쫓겨난 인물이오. 남의 약점만 뜯어먹고 사는 악발이죠. 그러니 공무원 생활이 욕심나면 키스 정도는 선물해얄 거요. 돈봉투를 주면 수월하겠지만 그자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건 받지 않아요.”
  “꼭 연극 대사 같네요. 그럼 제가 키스를 선물하면 잔 형사님은 제게 뭘 선물하실 거죠?”
  어렵쇼? 이 아가씨 봐라. 보통내기가 아니네. 스무 살짜리 시골처녀가 언제 이렇게 발랑 까졌지?
  “글쎄요. 선물은 나중에 말하죠. 미리 말하면 싱거우니까.”
  달빛이 출렁이는 호수 복판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 속 어디에선가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 형사님은 참 좋은 분이더군요. 잔 형사는 괴로운 사람이오. 자기가 소망한 길을 개척하지 못하고 먹고살기 위해 딴 길을 가고 있소. 그 친구는 너무 큰 걸 노리고 있어요. 하느님이나 들어줄 수 있는 사업이라 고통스럽게 살아갈 인물이오. 만약 수니 씨가 고달프게 살 의향이 있는 여성이라면 그를 만나보시오. 피곤한 만큼 즐거움도 클 거요. 추 형사님이 그러시길래 제가 물어봤죠. 하느님이나 들어줄 사업이 뭔지.”
  “무슨 사업이랩디까?”
  “대답을 회피하셨어요.”
  “궁금하겠네요?”
  “그래요.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대답할 계제가 아뇨. 밤 기온이 찬데 그만 돌아갑시다.”
  나는 점퍼를 벗어 수니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오늘 밤 즐거웠어요.”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긴 좁은 바닥인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죠.”
  “생각나면 군청으로 찾아가죠 뭐.”
  “찾아오실 것 없어요. 제 어깨에 걸쳐준 점퍼를 반납해야죠.”
  그 애정 어린 말에 미소로 보답한 나는 발길을 돌렸다. 대여섯 발짝 걸어갔을까, 갑자기 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잔 형사님은 좀 이상한 분 같아요. 똑똑하면서도 맹한 것 같고. 세상에 없는 걸 찾아다니는 바보랄까.”
  순간,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충격이 가슴을 쳤다. 나는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여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날 밤 여관에서 수니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주 끝자락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누가 해소해 주겠소. 하느님께서나 해소해주실까.”

1970. 1. 1

  양력 명절로는 처음으로 아버지 제사를 모셨다. 앞으로는 양력 제사를 모셔야겠다. 수니 힘이 컸다. 그녀가 연자를 데리고 모든 제사 음식을 차렸다.

  문명은 성장이 아니라 개조다. 문명 된 인간도 하나의 다른 형태의 표상체일 따름이다.
한편 문명이란 인간적인 행위일 따름이며 어떤 필연성이 내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본체는 의지태가 아니다. 표상체의 각 양태는 취산聚散이 좌우한다?

1970. 1. 31

  드디어 서울 발령이 나다. 발령지는 동대문경찰서다. 우선 군청으로 전화해서 수니에게 서울에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수니는 무엇보다 처음 서울에 가본다고 달뜬 목소리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