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37회)

충남시대 2024. 8. 13. 15:10

아폴로11호 달을 정복하다


  북평 시가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무릎재 산정에서 분대별로 전투배치에 들어갔다. 광활한 산악을 분담배치해야 한다. 나는 분대원 9명을 3개조로 나누어 약 5백 미터 거리를 두고 요새에 배치했다. 능선에 참호를 파고 매복근무에 들어갔다.

1969. 6. 12

  낮에는 반합에 밥을 지어먹고, 산마루에 지는 석양이나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재미가 크지만 밤에는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오줌을 눌 때도 두 명이 등을 돌려 사주경계하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솔잎을 사타구니에 대고 쌌다.
  가끔 돼지고기가 보급되었는데 비계뿐이었다. L-19 정찰기에서는 자수하라는 삐라가 뿌려지고 확성기로도 자수를 권유했다. 1명 생포, 1명 사살, 하지만 1명은 오리무중이다. 과연 게릴라전은 소모가 컸다. 세 놈을 잡기 위해 군 경 예비군이 총동원되었다.
  험준한 기슭을 따라 자드락길이 구불구불 그어져 있다. 계곡 깊은 곳에 어쩌다 두세 채 독가촌이 보였다. 모진 삶이다. 그 길로 어쩌다 지나가는 아가씨의 스커트자락이 보이면 대원들은 야호를 외치며 야단이었다.

1969. 6. 14

  보름 이상 전투에 참가하고 수염을 깎지 못한 채 하산했다. 나는 작전본부가 된 지서에서 대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함께 치안국장(경찰청장)에게 보고했다. 그때 대장이 나를 국장에게 소개하며 거진임검소 사건의 당사자임을 밝혔다. 국장은 "말썽이 없도록 하지....." 하며 걱정 말고 근무나 잘하라고 위로해 주었다.

1969. 7. 1

  금산 막사에 도착하니 또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206전투경찰대가 데모 진압차 서울 청량리경찰서로 출동하라는 명령이었다. 6시 급행열차를 타려고 4개 트럭에 분승하여 역으로 출발했다. 나는 태호 때문에 사정하여 내일 혼자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청량리경찰서 어디에 애를 맡긴단 말인가. 참 기막힌 팔자다. 어린 자식을 데리고 데모진압에 나서야 하다니. 내일 배낭과 총을 메고 어린 자식과 기차 탈 생각을 하니 숫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969. 7. 8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합숙중인데 애와 함께 지냈다. 직원들이 애를 예뻐해주었다. 상사들은 내 처지를 이해하고 혼자 대관령 전투경찰대 막사의 막사지기로 발령을 내주었다. 고마웠다. 별장 같은 한가한 막사에서 소설 창작에 전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곳에 언제 살아보겠는가!
  당장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야간열차를 탔다. 그때 하얀 투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홍익회원을 불러 태호에게 과자를 사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치레를 하자 그녀는 내 경찰복장을 살펴보며 강릉경찰서에 근무하시냐고 물었다. 강원경찰청 전투경찰대 소속인데 대관령에 있는 빈 막사 관리자로 발령이 났다고 하자 자기는 관상대에 근무하는데 고향인 상주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관상대 근무란 말에 친밀감이 느껴져 직종을 물어보았다.
  “타이피스트예요.”
  “그런데도 내가 왜 못 봤을까요?”
  “그게 무슨 말에요? 나를 못 보다뇨?”
  “나 이래 봬도 공군 25특기자요.”
  “기상특기면, 공군중앙기상부에서 근무하셨나요?”
  “맞아요. 중앙기상부장님(공군 대령) 모시고 관상대 통계과에 자주 들른 적이 있죠. 하지만 6년 전쯤이라 아가씨를 만난 적이 없을 거예요”
  “6년 전에는 여고생이었죠. 그런데 왜 군인이 관상대에 출근한 거죠?”
  “대통령 지시로 인공강우人工降雨를 계획 중이었는데 중앙기상부장이 통계자료를 브리핑하러 주기적으로 청와대에 들렀거든요. 나는 부장님을 수행해서 통계자료를 챙겼고요.”
  “그런 인연인데 잘됐네요.”
  “뭐가요?”
  “사표 내고 집에 가는 길인데, 시간이 널널하거든요.”
  “그래서요?”
  “대관령까지 동행하고 싶다는 말이죠.”
  “전투경찰대 막사라 아무도 못 들어가요.”
  “빈 막사라면서 눈감아 줄 수 있잖아요? 나 정숙한 여자예요. 효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때 태호가 효임의 소매를 흔들며 함께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는 아침나절에야 강릉역에 도착했다. 금산에서 택시를 불러 드렁크에 간단한 부엌살림을 싣고 태호와 효임을 태워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넘었다. 막사는 태백능선으로 에둘러진 횡계 분지 복판에 있었다. 주변에는 고랭지(高冷地) 감자밭이 즐비했다. 막사 앞으로는 서울 강릉 간 비포장 국도가 가로지르고 우물이 있는 뒤란에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초가와 스키산장을 품은 산기슭에서 풀을 뜯는 가축들의 모습이 한가로웠다.
  파란 풀밭에 나란히 서 있는 막사 4동과 창고 중에서 우물이 가까운 막사에 방을 꾸미기로 했다.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목침대가 쭉 놓여 있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실내가 눈부실 정도로 환했다. 내가 처음 입실한 셈이었다. 창고 문을 열어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품들이 모두 신품이었다. 분대별 부엌살림도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이부자리와 방한복을 안아다 총알이 뚫지 못할 만큼 벽에 성벽을 쌓았다. 효임도 방한복을 날라주었다. 공비가 습격해도 횡계지서에서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혼자 대응사격으로 버틸 수 있었다. 방 두 개를 꾸며 하나는 효임이 쓰게 하고 하나는 내가 태호를 데리고 지낼 참이었다. 꼭 캠핑 온 기분이었다. 밤에는 막사를 밝히는 외등을 모두 켜놓았다.
  이튿날은 늦게 일어났다. 어느새 밥상이 마루 가운데에 차려져 있었다. 미처 양념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효임이 일찍 횡계에 나가 식재료를 챙겨 온 모양이었다.
  낮에는 뒤란 우물가에서 옷을 벗고 목욕했다. 한여름 햇살이 뜨거워질 무렵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그늘에서 효임과 잡담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마당에 까만 지프차가 나타났다. 나는 무슨 차인지 몰라 물젖은 팬티와 티셔츠만 걸친 채 천천히 다가갔다. 지프차에서 내린 작업복 차림의 경찰간부가 경무관(경찰계급 편제 이전)임을 확인하고서야 얼른 자세를 세웠다.
  “청장님이셔. 초도순시 중이시네.”
  수행한 간부가 말했다. 당황한 나는 내복 바람인 채 부동자세로 근무보고했다.
  “막사 경비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지휘봉을 든 강원경찰청장은 내 모습과 저쪽 귀퉁이에 서 있는 효임을 번갈아보고 나서 막사 안으로 들어가 생활 모습을 살폈다. 근무자 혼자 기거할 숙소에 여자 옷이 걸려 있고 화장품이 놓여 있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청장은 굳은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때 마당구석에서 뛰어놀던 태호가 아빠를 부르며 쫓아와 매달렸다.
  “자네 아들인가?”
  “네.”
  “하마터면 실례할 뻔했네. 웬 여자가 부대에 들어왔나 하고 오해했지.”
  청장은 태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행원이 차에서 가져온 껌 한 통을 쥐어주었다. 착실한 부하 직원을 호색한으로 오해한 걸 미안해했다. 나는 양심이 찔렸다. 청장이 탄 지프가 산모퉁이로 사라진 뒤에야 효임을 바라보았다. 내 몸이 왜 굳어 있는지를 모르는 효임은 그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저승에서 내려온 염라대왕이셔.”
  “높으신 분인가 보죠?”
  “경찰청장님인데, 당신을 보고 누구냐고 묻길래 아내라고 했지.”
  “왜 거짓말을 해요?”
  “안 그러면 파면당하니까.”
  “이제 나하고 살 수밖에 없네요.”
  효임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무기고로 들어가 총기와 수류탄을 비롯한 여러 장비를 정리했다. 공비 출몰이 예상되는 지역이라 위험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봉급과 특근수당까지 받으며 매일 책을 읽고 습작할 수 있어 좋았다. 가끔 횡계지서를 찾아가 직원들과 잡담을 나누었는데 특히 최 경사와의 대화는 유익했다. 그는 철학서를 좋아한 경찰관으로 어저께는 그에게서 플로티노스의 <에네아데스>를 빌려왔다.

1969. 7. 16

  곧 역사적인 달 탐사선 아폴로11호가 발사된다. 1970년대에는 화성에 인공위성을 보내고 90년대에는 달에 관광객이 갈 수 있게 되고, 인체냉동이나 토코페롤과 같은 영양소의 발견으로 영생이 가능하고, 인간은 앞으로 상상 못 할 신적인 사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바로 인간은 신인 셈이고 그 과정이 역사가 될 것이다. 앞으로 신이란 추상적인 상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 바로 신이다.

1969. 7. 18

  미국 학래에게 편지를 썼다.
  학아, 이제 인간은 권리를 주장할 대상이 없어진 것 같다. 무턱대고 자기 의무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책무를 지고 말았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고통을 지탱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공간이 어디에서 끝난다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질문은 아직 유효하다.

1969. 7. 20

  오늘 밤 10시가 되면 창세 이후 가장 신비스런 광경이 펼쳐진다. 인간이 신의 세계를 넘볼 수 있는 순간이다. 케이프 케네디에서는 벌써 최종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둘러 막사로 돌아온 나는 라디오를 켜고 일기장과 볼펜을 준비해 놓았다. 라디오 뉴스를 분초 단위로 일일이 기록할 참이다.
  45억 년의 신비는 드디어 풀릴 것인가? 20시 17분. 고요의 바다 20km 상공에서 아폴로 선장 암스트롱과 착륙선 선장 올드린은 사령선 조종사 콜린스를 사령선에 남겨둔 채 이글호로 갈아탔다.
  “휴스턴! 여기는 고요의 바다..... 이글호는 달에 착륙했음.”
  이글호에서 암스트롱이 처음 한 말이었다. 
  11시 40분. 드디어 해치가 열렸다. 11시 56분 20초(현지시간 1969년 7월 21일 2시 56분). 달 착륙 후 약 6시간 반 만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에서 내려 달에 역사적인 첫 발자국을 찍었다. 그의 발자국은 약 50만 년 동안 남아 있게 된다. 그의 감동 어린 육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