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41회)

충남시대 2024. 9. 10. 13:42

서울대학교 모의재판과 전태일 사건


 

1970. 11. 18

  지난 11월 13일,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외치며 싸우다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한 전태일 군(23)의 비참한 최후를 보고 가슴이 무너진다. 평화시장 재봉사로 일하면서 열악한 환경에 혹사당하는 동료들을 위해 노동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가 분신한 그 애통이 눈물겹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침을 뱉고 싶다. 그런데 그 사건을 다루기 위해 하필 내가 선정되다니!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모병원이 중부서 관할이지만 얼굴이 생소한 동대문서 직원인 내가 현장을 맡게 되었다.
  “중부서 정보과는 모두 얼굴이 팔려서.....”
  2계장의 말이었다.
  “보통 사건이 아닌데, 제 능력이 모자라서 걱정됩니다.”
  나는 전태일 사건에 관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경찰의 조직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온 나지만 전태일 분신사건만은 피하고 싶었다.
  “계장들끼리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네. 자넨 온화한 인상이어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거든. 외모도 학생풍이고. 그래서 적임자로 선정된 거야.”
  “제가 적임자라면 할 수 없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무슨 소리야? 잔 형사는 지금 유능한 형사로 평가받고 있어. 정보과 스타란 말야. 그래서 채증요원으로 발탁된 거구. 이번 일은 가만히 지켜만 보는 업무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네. 할 일도 없고.”
  밤이 되자 나는 추모객으로 위장하여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에 침투했다. 열댓 명의 후줄근한 남녀 직공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학생풍의 청년이 받았다. 곧 노동청장이 나타난다는 연락이었다. 그들은 모여 앉아 어떻게 항의할지를 의논했다. 나는 한쪽에 서 있는 추모객과 섞여 눈치만 살폈다. 내 임무는 서울대 법대생들이 전태일의 시신을 몰래 빼돌린다는 첩보가 있어 그 계획을 무산시키는 공작이었다. 장례식을 교내에서 치러야 독재타도 시위를 더욱 격화시킬 수 있다는 게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학교 현수막 구호 역시 ‘중앙정보부 해체’로까지 격화되고 있다.
  노동청장이 정숙한 자세로 지하 빈소에 들어섰다. 먼저 조의를 끝낸 청장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직공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여태까지 모른 척하다가 학생들의 시신 인수가 거론되자 이제야 나타났냐는 항의였다. 나는 입을 다문 채 팽팽한 긴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청장은 말도 못 한 채 잠시 서 있다가 자리를 떴다. 그때였다. 학생풍의 젊은이 서너 명이 들어와 빈소를 지키던 젊은이들과 귓속말로 몇 마디를 나누더니 나를 흘끔 훔쳐보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사실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정보형사가 병원 빈소에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로 학생들의 접선사실을 알리고 자리를 떴다.

  전태일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시국을 뒤흔들었다. 학교, 언론, 종교, 노동 등 각계에서 연일 시끄러웠다. 학생들의 소요사태는 날마다 격렬해졌고 기독교계에서는 여기저기서 추도예배를 거행했으며 언론에서는 사설로 다루기 시작했다.
  지난번 전태일 추도식 행사장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김상돈 의원, 장준하『思想界』사상계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 등이 참석했는데 나는 김상돈을 연행버스에 태우는 일을 거들고 김대중 후보가 보낸 화환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백범사상연구소 백기완 소장과는 구면이어서 얼굴을 피해야 했다. 고교시절 내가 4대공립인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학생들을 선발하여 조직한 ‘청진회靑進會’에 고문으로 추대한 인물이어서 도저히 연행할 수 없었다. 그가 원효로 전차 종점에서 거주할 때는 자주 집에 찾아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고교2학년 때는 한국학생총연합회 회장인 백기완이 이끄는 농촌계몽사업에 동참하여 구례 섬진강가에서 계몽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발대식을 갖고 구례로 떠날 때 열차 한 칸을 채운 대원 모두가 대학생이고 나 하나만 고교생이었다.
  “틀림없이 강연회가 가두시위로 이어질 걸세.”
  반장의 말이었다. 여기에서 강연회는 한국기독교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전태일 추모 강연회를 의미했다. 학생들이 ‘종교는 죽었나’와 ‘부활과 4월혁명’을 주제로 강연회를 연 다음 대형 십자가를 메고 50여 명이 가두시위할 거라는 첩보가 있었다. 이미 동대문 병력 말고도 기동대 병력을 대기시켜놓은 상태였다. 50명에 불과하다지만 그건 연막전술이었다. 그게 열 배 스무 배로 불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강연회도 연막일지 모를 일이었다. 행사 시간도 애매했다.
  나는 기독교방속국에 도착하여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의외로 조용했다. 함석헌 옹을 중심으로 십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십자가를 메고 조용히 행진만 할 테니 이해해요.” 함석헌의 점잖은 요구였다.『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思想界』고정 필진인 함석헌은 내가 존경하던 지성인이었다. 나는 고교시절부터 최고의 교양지였던『思想界』를 탐독했던 것이다.
  “종로5가까지는 묵인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내 유연한 목소리에 함석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요란한 함성이 들려와 창을 열고 내려다보니 어디서 나왔는지 십자가를 앞세운 200여 명의 데모대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얼른 진압부대에 연락하고 건물을 뛰쳐나갔다. 데모대는 찬송가를 부르며 질서 있게 행진했다. 그런데 종로5가에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와 하고 종로3가 쪽으로 밀고 올라갔다. 세종로를 향했던 것이다. 나는 급보로 실정을 알리고 채증에 들어갔다. 금방 동대문서 대기병력이 출동하고 뒤미처 내자동 기동대에서 대기 중이던 진압부대가 세종로를 지나 종로 쪽으로 집입하고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는 선도차를 따라 기동대 버스 4대가 달려와 파고다공원 앞에서 진을 쳤다. 도로를 차단한 버스에서 진압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페퍼포그가 터지기 시작했다. 종로통에는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나는 이미 파고다공원에 도착하여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악착같이 밀고 올라온 학생들은 기동대의 진압에 눌려 무너지고 말았다. 체포조에 끌려가는 데모꾼들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저렇게 무너지면서 뭘 하겠다고 파고다까지 기어온단 말인가. 하지만 전태일 추모 행사와 가두시위는 날이 갈수록 무성해졌고 그걸 기화로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었다. 학교 군사교련 전면 철폐와 언론자유 수호가 그 한 예인데 어제 있었던 고려대, 서울상대, 성균관대생들의 극렬한 가두시위도 그 요구사항의 관철이 목적이었다. 내가 서울대 문리대에서 입수한 결의문에도 학교 군사훈련 반대에 대한 당위성이 적혀 있었다.

1970. 12. 3

  깊은 밤. 나는 아내에게 유언을 말해주었다. 내가 형식을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결혼식이나 호적등재를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내 유일한 아내는 여수니 뿐이라는 것과, 태호와 유라를 잘 키워달라는 것과,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기억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내 귀여운 딸이 까르르 하고 처음 웃었다.

1970. 12. 21

  거룩한 밤이다. 무르익어가는 X-MAS 무드. 며칠 전 나는  댁을 찾아가 그의 형과 처음 만났다. 총무처 연금국장을 만나서 나는 1시간 정도 사회상과 인생관을 이야기했다. 나는 창작을 위해 직업을 버리고 먼저 떠날 거라고 말했다.

1970. 12. 28

  두 달 만에 이화장에 들렀다. 마침 윤치영 대통령 고문(초대 내무부 장관, 공화당 의장)이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방문하고 나가는 중이었다. 양아들 이인수(39) 교수가 내 손을 잡고 프란체스카 여사 방으로 안내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교수 부부와 셋이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 번 방문한 터라 내 방처럼 편했다. 셋이 무려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곳에서도 사회 부패가 대화의 주제를 이루었다. 농담도 했다. 거실을 나올 때 이 교수가 우리 집 주소를 물었지만 산동네 판자촌 주소가 창피해서 이사 간다는 핑계를 댔다. 사무실에 돌아와 첩보를 썼다.

  밤 7시에는 반도호텔 다이나스티룸에서 열린 용산고 11회 동창회에 참석했다. 장학금 모금에 나는 제일 적은 3,000원을 써냈다. 소령으로 진급한 성열 등 5명과 무교동에서 술을 마셨다. 성열이는 군인이면서 문학성이 다분했다.
  다음은 그동안 발표한 첩보 중에서 간추린 내용들이다.

  김대중 후보 유세에 따른 주민 여론
  김 후보의 효창운동장 강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특히 부녀층)은 김 후보의 강연은 예상한 내용인데 그의 말을 믿기보다는 일종의 고발이라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으며 특히 사회 부패상이나 예비군 문제는 청중의 가장 큰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임.

  중소 섬유업자들의 동향
  미국의 밀즈법안이나 일본 섬유업자들의 경쟁 등 해외시장 판로에 심한 타격이 예상되어 섬유제품 업자들의 업종 전환 사례가 늘고 있는 실정임.

  대학가 여론에 대한 대책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가에 유포된 언동에 의하면 명년 신학기에 들어서면서 교련문제와 전태일 사건으로 비롯된 근로자 처우 문제, 그리고 선거 여파에 따른 격동이 예상된다고 하니 전체 학생의 관심을 유발시킬 대대적인 행사나 학업에 치중하도록 하는 대량 등용 등의 시책이 요망됨. 

  공화당에 대한 여론
  대선을 전제로 각 동 단위 지역에서는 대소 규모의 각종 친목회가 행정력의 뒷받침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바, 회원 포섭 대상이 소위 영향력자라 하여 자연히 친여적인 지역 유지가 되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득표에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며, 차라리 유동적인 서민층을 규합시키는 조직과 뒷받침이 요청된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