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약 150만 명
1971. 4. 27
오늘은 제7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전국의 유권자 수는 약 150만 명.
1971. 4. 28
박정희 후보가 94만 표차로 승리했지만 공정선거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 후유증이 클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보 계통의 수고가 득표에 얼마나 유효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자유당시절처럼 표를 만들어 내지 않고는 과연 그런 수고가 득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겠다. 국민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말이다.
예상한 대로 신민당에서는 4.27 선거를 무효라고 주장했다. 나는 동대문 갑구 개표장 경비본부에서 TV를 보며 밤을 새웠다. 경상도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4배 내지 6배로 우세하고 전라도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2배로 우세했다.
1971. 5. 1
대선을 끝내고 또 총선을 치러야 하니 우리는 잠시 쉬어야 했다. 그래서 정보 1, 2, 3계와 외사계 그리고 파출소 사복근무자까지 70여 명이 비원으로 놀러 갔다. 각 기관과 업체에서 음식과 맥주를 챙겨 왔다. 서장 이하 혼연일체가 되어 오락시간을 가졌다. 밴드와 가수도 동원했다. 나는 지목을 받아 <대관령 길손>을 불렀다. 모두 술에 취해 엉망이었다.
1971. 5. 18
동대문구청에서 무려 6시간 동안 정치적 사건을 채증하고 돌아왔다. 사건 내용은 신설동회에서 국회의원 보충 선거인 명부를 작성하는데 무단 전출자 내지 유령유권자를 이중으로 허위 기재했다 하여 신민당 측에서 물적 증거를 가지고 당원 50여 명이 구청장실에 몰려와 폭력을 쓰고 난동을 피웠다. 나는 신문기자들과 함께 기자행세로 침투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채증한 자료는 지휘보고 및 즉보사항이었다.
밤 10시 20분경. 신민당 동대문갑구 송 의원이 나타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신민당원 봉기나 총선거부 사태를 일으킬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신민당 비서진들은 내 정체를 알고도 가만히 있어줘 고마웠다. 그들은 정보과장까지 퇴장을 요구하면서도 평소 나와 사이좋게 지내온 의리를 지켜주었다.
신민당 측에서는 명부 재작성할 것, 호별방문을 방해하지 말 것, 투표용지 배부를 중지할 것 등을 요구했고 그렇게 합의가 되었지만 송 의원이 나타나 내일 신민당원을 총 동원해 농성할 것을 결의하고 일단 해산했다. 경찰 측에서는 신설동장을 과잉충성, 사무착오, 신민당 측 사꾸라(포섭되어 공작한 것) 등 세 가지 분야로 수사하기로 했다.
나는 정보과장과 지프를 타고 사무실로 와보니 정보부요원이 비상대기하고 있었다.
1971. 5. 19
골목 구석진 인쇄소에서 극비리에 찍은 김대중 후보의 선거유세지침을 구입했는데 그게 큰 성과였다. 중요 책자를 구했다며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나는 인쇄공 하나를 포섭해서 비밀을 알아냈던 것이다.
1971. 5. 24
비가 내리는 데도 학생 데모는 계속되었다. 오늘은 의대생들까지 나와 양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구속학생 석방에서부터 “위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통곡”까지 외쳤다. 사실이다. 통곡할 문제였다. 그리고 통곡할 문제는 민주주의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문제였다. 요즘 군인들의 납치사건, 수류탄 투척사건,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그 탓이었다. 정의가 권모술수에 넘어지고 마는 내막과 현실이 두려웠다. 건실한 야당을 바라는 국민에게 신민당 역시 공화당 못잖은 실망을 주고 있다. 그들 역시 국가관과 거리가 먼 자기들 잇속에만 눈이 멀어 있다.
1971. 5. 25
오늘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채증요원인 나는 동대문갑구 개표장에서 철야 대기했다. 신민당의 표가 강세다. 직원들은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다. 정보형사뿐 아니라 경찰은 야성향野性向을 지닌다. 그럼 왜 야성향일까? 약자에 대한 배려심 때문이다. 하지만 집권당을 위한 업무는 철저하다. 정말 앞잡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헌신적이다. 그게 경찰의 충성이고 고뇌(이중성)이다.
1971. 5. 26
서울에서는 18개 구 중 17개 구에서 신민당이 승리했다. 압승이다. 경상도에서도 신민당이 대거 당선되었다.
모름지기 신민당은 이 나라 국민의 갸륵하고 위대한 충정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신민당이 예뻐서 찍어준 게 아니다. 심지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까지 이 나라 야당 육성과 공화당 횡포를 막기 위해 표를 던져준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을 재평가해서 위정자는 바야흐로 이 나라에도 민주주의 정신이 만개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1971. 5. 27
새벽 4시 반까지 출근하라는 정보형사 비상소집이 관내 파출소를 통해 전달되어 일찍 깼다. 데모로 서울대 법대, 문리대, 상대가 휴교조치를 당했는데 무슨 특이한 동정이 있나 보았다. 총선 결과 야당의 대승으로 견제세력이 확보되어 선거후유증도 없을 텐데. 구속학생을 석방하지 않고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당국의 처사가 한심하다. 어느 후보는 영세민에게 약속한 밀가루를 주지 않았다. 낙선했대서 약속을 깨도 되는가?
1971. 6. 11
오늘부터 휴가를 얻었지만 사표를 냈다. 아침에 신고한 5일 간의 휴가가 아주 영원한 휴가가 된 셈이다.
.....부득이한 가정사로 인하여 사직원을 제출하오니 청허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사표를 만류하는 여러 상사들을 설득하며 사표제출의 신속한 절차를 밟았다. 어저께 대폭 인사이동이 있었을 때 나만은 채증 공로로 그냥 남아 있게 되어 동료들이 부러워했는데 그런 내 신임이 불과 2일이 지난 오늘 사표가 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휴가신고 직후에 북부서 수사계로부터 고소를 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고 서슴없이 사표를 작심했던 것이다. 악마 같은 그년의 압박용이었다. 네가 위자료를 주면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죽일 년! 제가 낳은 어린 자식을 굶길 판인데 그런 악독한 짓을 하다니! (훗날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를 만나 애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는 내 유일한 재산인 20여만 원의 퇴직금을 미리 받아 내 가족(아내와 어린 두 자식과 눈먼 어머니)을 굶기지 않으려고 동결되기 전에 사표가 수리되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서류를 내가 직접 들고 택시로 서울경찰청 인사계로 달려간 시간은 오후 3시였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누런 봉투 속에는 내 자필 사직서와 경무과에서 작성한 퇴직발령서 2통이 들어 있었다. 택시 창으로 보이는 서울의 거리는 회색으로 흐려 있었다. 생계 걱정에 눈이 흐렸지만 한편 그녀와의 악연이 끝난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후 6시. 정보과장(훗날 국회의원)이 왜 경솔하게 사표를 썼느냐고 화를 내면서 즉시 서울경찰청으로 전화를 걸어 결재를 보류하고 회수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장에게 낸 내 기구한 하소연이 과장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똑똑하면서도 가여운 부하 직원에 대한 동정심이 화까지 나게 한 모양이었다.
“돈도 없이 나가 어떻게 살아갈 거야. 그까짓 일로 사표를 내? 암소리 말고 빨리 서류를 찾아와!”
나는 과장 지시로 아까 가지고 갔던 사직서류 3가지를 도로 찾으러 경찰청으로 택시를 몰았다. 감독자로서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것도 본인이 제출한 사표서류를 반송해달라고 부탁까지 하며 찾아오게 시키는 정보과장의 고마움이 눈물을 자아냈다.
1971. 6. 13
수니도 북부서에서 조서를 받고 형사와 함께 집으로 왔다. 경찰서에서 수니가 조서를 받는 동안 나는 옆에서 유라를 안고 있었다.
옆방 경숙 엄마와 처녀들로부터 참고인조서를 받았다. 그녀가 고소한 날짜가 71년 5월 17일이니 형사소송법상 6개월 시효가 훨씬 넘었던 것이다. 혜화파출소 근무 당시인 지난해 여름부터 그녀는 수니와의 동거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니를 만나려고 서너 차례 산동네 집으로 찾아와 행패까지 부렸던 것이다.
1971. 6. 14
북부서에서 그녀와 대질심문을 받았다. 다음은 담당 서 검사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자술서인데 경찰조서에 첨부되었다.
.....본인은 간통죄로 고소를 당한 동대문경찰서 정보과 2계에 근무하는 잔아입니다. 이 글은 어떤 관용을 바라고 쓰는 것만은 아닙니다. 솔직한 처지를 이해해주십사 하는 뜻에서, 간통이 단순한 방종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싶어 드리는 글입니다.
저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제 나름의 윤리관을 한시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 책임질 어떤 사유가 비록 타인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해도 저 자신이 감수해얀다고 여겨왔습니다. 때문에 긴긴 세월을 참아왔으며 그 바람에 저는 행복보다는 고통을 더 탐하는 야릇한 체질변화마저 겪으며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빨갛고 노란 고운 단풍보다는 낙엽진 앙상한 가지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정도로 제겐 행복이란 것이 어색하고 다른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는 외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70 노령의 아버님이 절머슴살이로 생을 마감하셨고 공군생활을 의가사제대로 마감했으면서도 항상 벗과 더불어 명랑했던 제가 한 여성에게서 시달려온 십 년 동안의 사연들, 몇 차례나 입산수도를 결심했으면서도 앞못보는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의 생계 때문에 그럴 자유마저 잃고 부산경찰국으로 강원경찰국으로 전전해야 했고, 상사들에게서 얻은 신임마저 수포로 돌아가게 한 아픈 사연들이 그처럼 제 감성마저 마비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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