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42회)

충남시대 2024. 9. 24. 16:49

신민당중앙당 동향


1971. 1. 20

  당 의장을 지낸 최 의원의 전화를 받고 집을 방문했다. 나는 하바드대학을 나온 그분을 정치인으로서 보다 학자로서 따랐다. 최 의원은 내가 거실에 들어서자 2층에서 내려와 막내아들 뻘인 내 외투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내가 사양하자 “우리 나리”라고 농담하며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때 거실에 앉아 있던 군복 차림의 두 장성이 자리를 뜨자 최 의원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우리 아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지난 초겨울에 내가 연대 교수인 최 의원 아들과 이화장 이인수 교수를 다방으로 불러 인사를 시켰는데 그걸 고맙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1공화국(이승만)과 제3공화국(박정희)의 만남이랄까?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어색한 사이인 이인수 연세대 교수와 최 연세대 교수가 내 주선으로 이화동 해다방에서 만났던 것인데 모두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자유당시절 최 의원은 박해를 당했었다.
  최 의원은 내 강릉대용교소도 간수생활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살인범을 암송 중에 풀어주고 서대문교도소에서 다시 만난 짜릿한 실화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잔 형사는 아무 때고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
  “사실 창작에 전념하고 싶어도 짬이 없어서 괴로워요.”
  우리는 2시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정부패와 차관(借款) 축재(蓄財), 불신사회 풍토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서로가 흥분할 정도로 치열했다. 우리는 나이를 떠나 각자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공무원 사회의 부패를 이야기할 때는 최 의원이 “총무처 연금국장 같은 사람은 청백리”라고 칭송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연금국장은 내 절친한 친구의 형으로 행정고시를 패스한 최연소 국장이었다.
  “이게 내 마지막 저서일 거야.”
  헤어질 때 최 의원은 자서전『人間相』을 내밀었다. 사인 란에는 ‘殘兒 惠存’(잔아 혜존)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진열장에서 파이프 1개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옥인동 김 국장 댁에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이 받았다. 국회에 자자한 청백리 평판을 알렸더니 연말에 가장 기쁜 덕담을 들었다며 감격했다. 그리고 내가 선사한 슬리퍼(500원)를 신을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고 고마워했다. 김 국장은 훗날 경기도지사로 발령이 났는데 내가 수원 관사에 들렀을 때도 청백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71. 2. 16

  미도파 앞 다방에서 안 장군 미망인과 만났다.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진한 이야기를 꺼냈다. 심지어 결혼하면 연금이 안 나온다는 말도 했다. 밤에는 노량진 독일 빵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9시경 둘이 국립묘지를 찾아갔다. 밤이 깊어 헌병들이 영업차 출입을 막았다가 내가 명함을 꺼내주고 장군 부인임을 밝히자 둔중한 정문을 열어주었다. 어둠이 쌓인 묘원. 조명등 불빛이 뿌연 아스팔트길을 택시로 달려 장군묘역을 찾아갔다. 이 대통령 묘역을 지나 차는 계속 언덕길을 오른다. 숲속으로 들어가자 묘역 입구가 나타나고 우리는 차에서 내려 층계를 올랐다. 부인이 남편 무덤 앞에 서서 절을 했다. 나는 묵념으로 예의를 차렸다.

1971. 3. 5

  세운상가에 있는 아서원에서 전 부총리였던 장 의원 초청 파티에 참석했다. 이번에 서울에서 출마한 그는 구청장, 서장, 정보담당들을 초대했는데 나는 술에 취해 국도극장에 들어가 졸다가 나왔다. 나중에 간판을 보니 <미워도 다시 한번>의 후편이었다.

  신민당중앙당 동향
  1) 신민당에서는 소속 국회의원과 운영위원들에게 당비조로 1만 원씩을 납부하라는 공한을 발송했으며,
  2) 각 지구당에 공한을 발송하여 옥 내외를 막론한 강연회, 세미나, 사랑방 좌담회를 3월 2일까지 개최하고 그 성과와 반응을 중앙당에 보고하고 선거 붐을 조성하라는 지령을 내림.
  3) 참관인들의 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 무더기 투개표 등 부정선거 요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투개표 시 참관인 중 반수를 타 지역인으로 섞어 배치할 것이라 하며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선정된 참고인을 합숙교양시킬 거라고.

1971. 4. 12

  서울시에서 사상 처음 지하철(1호선) 기공식을 가졌다.

1971. 4. 18
  
  장충공원에서 김대중 후보의 강연회가 있어 나는 카메라를 메고 나갔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수니에게 애들을 데리고 일찍 나오라고 일렀다. 강연 시간 전에 영빈관(지금의 신라호텔 자리) 앞 공터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다. 항상 바쁜 탓에 계절을 잊고 살아온 터라 모처럼 봄구경을 시켜주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강연시간은 앞으로 두 시간이나 남아 있으니 채증반의 역할은 한가한 셈이었다. 연두색이 짙어지는 장충공원에는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수니가 유라를 등에 업은 채 한 손은 태호의 손을 잡고 한 손은 작은 손가방을 들고 영빈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달뜬 표정이었다.
  “인파가 밀려서 겨우 뚫고 왔어요.”
  수니가 지친 목소리로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아내의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직 바람기가 선선한데 무척 지친 모양이었다. 나는 손가방을 먼저 챙겨들었다. 유라는 엄마 등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빠야, 이거는 김밥이다이. 막흔 엄마가 만들었다이.”
  “그랬어? 우리 이따 맛있게 막자.”
  “응응. 그란데 왜서 사람이 많나?”
  “이따가 대통령에 출마한 분이 연설하거든. 앞으로 더 많이 모일 거야.”
  “그란데 출마가 머나?”
  “국민들에게 나 대통령 시켜주십시오 하고 부탁드리는 거야.”
  “이렇게 가족과 지내면 안 되잖아요?”
  아내가 민망하다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행사는 아직 멀었어. 계장님한테 양해도 받았고.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모처럼 가족과 지내라는 거야. 봄기운도 쐴 겸.”
   유라가 잠을 깨자 나는 세 식구를 데리고 장충공원을 멀리 배경 삼아 여러 커트를 찍었다. 태호와 유라는 독사진도 찍어주고 태호가 동생을 안은 자세로 찍기도 했다. 나와 수니도 영빈관 직원에게 부탁하여 정다운 모습을 찍기도 했다. 부부의 모습으로는 처음 찍어보는 셈이다.
  영빈관 안에서도 가족사진을 찍었다. 국빈으로 초청된 국가원수들이 묵는 영빈관은 출입이 통제된 공간이지만 나는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조경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채증용 고급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어서 가족들의 사랑스런 모습만큼이나 곱게 나오리라 생각하니 보드라운 셔터 소리가 유난히 경쾌했다.
  어느새 너른 공원에는 인파가 백절을 쳤다. 스피커에는 찬조연설이 요란했다.
  “내일은 민주주의가 살아나는 날입니다.”
  서울은 물론 경기지역에서도 청중이 모여든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특히 호남 유권자들은 거의가 참석할 거라고 한다. 자유당시절 해공 신익희 선생이 한강백사장에서 유세할 때 서울시민 30만 명이 운집했는데 군중들의 박수와 함성에 고무된 신익희 선생은 이튿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유세 차 열차에 몸을 실었다가 과로 탓에 갑자기 서거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부산중학교 3학년생이었지만 그 애통한 소식에 울적했었다. 엉엉 우는 학생도 있었다. 중학생만 되어도 정치의식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벌써 오십만이 넘었다는데?”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익희 선생 백사장 유세 때보다 훨씬 많다는 거야.”
  “모두 자진해서 모인 인파잖아.”
  “사상 초유의 인파라구.”
  을지로 입구에서부터 교통이 차단될 정도라니 공화당은 정신차려야겠다. 김 후보는 고무된 목소리로 호언장담했다. 부정선거가 없는 한 이미 결과가 난 거라고.
 이날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청중 앞에서 이번에 정권교체를 못하면 영구집권하는 총통제가 실시된다며 정권교체를 거듭 호소했다. 찬조유세는 유진산 당수, 박순천 고문 양일동 운영위 부의장, 김재광 서울시지부장, 김수한 대변인, 조윤현 의원, 이태형 여사 등이 맡았다.

1971. 4. 26

  내일이면 대통령선거일이다. 김대중 후보가 대광고등학교에서 마지막 야간 유세를 가졌다. 운동장과 인근 도로까지 꽉 찬 청중. 나는 카메라에 후래쉬를 켜고 현장에서 채증활동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세가 끝나고 청중들이 김 후보를 보기 위해 좁은 교문 앞에 운집해 있었다. 김 후보 차가 나오자 드디어 교문 앞에서 밀치고 미는 바람에 압사사고가 나고 말았다. 내일 선거를 앞두고 중대한 치안문제였다. 나는 그 장면을 신문사 지프 보닛 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은 오직 나만이 찍었다. 어느 보도진도 찍지 못했다. 
  밤 11시경. 나는 경찰서장과 함께 내무부장관실에 갔다. 경찰청장(치안국장)과 각 부장들도 동석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현장증거를 갖고 있는 나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내무장관은 내 노고를 치하했고 치안국장은 그 필름을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나는 장관 옆에 앉아 콜라를 함께 마시며 상황을 설명했고 경찰청장이 유도질문을 하는 데도 청장의 주장을 부인하면서까지 사실대로 소신껏 이야기했다. 나는 장관 경찰청장과 악수를 나누고 서장과 장관실을 나오면서 보도진이 밖에 진치고 있음을 보았다. 서장은 “잔아 똑똑하다. 다시 봐야겠다.”라고 극구 칭찬했다.
  내무부를 나와 서장과 함께 서울경찰청으로 가서 서울청장과 얘기하고 필름을 경찰청 현상소에 맡겼다. 천만다행으로 그 문제의 지프가 나타났다. 사실상 정치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사진이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주최 측 과실로 보도되었다. 내 설명대로였다. 나는 서울청장, 서장과 함께 청와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