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위해 부락이 화포작업을 하루 쉬다
1968. 4. 12
경찰서장과 명주군수가 쌀과 술과 고추장 등을 한 차 실려 보냈다. 사천지서장은 장례를 원만히 치르도록 진리 모든 부락에 내일 하루 화포(미역) 채취작업을 금지시켰다. 누구는 돈 벌러 바다에 나가고 누구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산역을 맡으면 불공평해서 아주 하루 쉬게 한 것이다.
낮에 염할 때, 나는 염꾼이 마포로 싸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더 만져보고 싶어 손, 발, 머리, 가슴을 쓰다듬었다. 따스한 자식의 손길을 느끼시며 아버지는 흐뭇하게 영겁의 수의를 입으셨으리라!
1968. 4. 13
상여를 붙들고 얼마나 슬피 울었던가!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나는 눈이 퉁퉁 부었다. 형식적인 곡은 싫었다. 눈을 뜨신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 그 한은 바로 내 한이었다.
아침 일찍 상여틀은 집 앞 파란 겨울 배추밭에서 짜여졌다. 상여 앞에 돗자리를 깔고 제를 올렸다. 어머니가 손을 더듬거려 마지막 떠나는 영감의 상여를 잡고 목놓아 울었다. 제사상을 물리자 상여는 자리를 떴다. 상여 뒤에는 상복을 입은 나와 어린 손자만 따랐다. 충청도에서는 한 사람도 오지 못했다. 다행히 진리부락 많은 청년들이 뒤를 따랐다. 나는 태호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에는 대지팡이를 짚고 울며 상여 뒤를 따랐다.
상여가 내 앞에서 두 번 절하며 자식과 마지막 고별을 할 때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마지막, 그렇다 내 인생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앙장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몇몇 청년들이 나를 위로하며 뒤를 따라준다. 어떤 어부는 내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었다.
마지막 마포에 싸인 아버지의 모습이 흙으로 덮일 때 그 마지막 모습을 강렬한 시선으로 뇌리에 담으려 애썼다. 인부들에게 아버지 옆에 티 하나 끼지 못하게 주의시켰다. 봉분에 떼를 입힐 때도 잘 살도록 부탁했다. 공동묘지일망정 정갈한 땅이었다. 뒤편에는 푸른 동해가 출렁이고 앞에는 훤한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멀리 태백의 능선 정면에는 우람한 봉우리가 솟아 있어 지관이 그걸 치표로 삼았다.
아버지 묘 앞에서 마지막 제를 올리고 태호와 절을 올렸다. 그때 어느 청년이 태호를 껴안고 울었다. 아마 가슴에 맺힌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제를 마치고 청년들과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떠나올 때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눈물에 얼룩진 눈으로 무덤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1968. 4. 15
삼우제를 지내러 중단을 입고 건을 쓰고 산소에 갔다. 마지막 상봉이 될지도 몰라 눈 어둔 어머니도 함께 모시고 갔다. 무덤을 매만지며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을 찢는다. 이제 나에게도 제사 지낼 묘가 있다는 생각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산소 양쪽에 어린 소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다.
1968. 4. 26
해안초소는 철수되고 나와 다른 직원 하나만 진리(사천진)포구에 선박임검소장으로 남게 되었다. 진리 1구에서 가장 유지격인 박씨네 기와집 사랑채를 수리하고 이사했다. 지서장과 면장이 보리쌀과 양념을 추렴해서 가져왔다. 고맙다. 어저께는 부여에서 서울로 이사한 매부와 누나가 와서 함께 산소에 갔다.
요즘은 새로 창설된 예비군 무기고를 짓는데 주야간 계속 작업 감독을 한다. 아무리 예비군이라 해도 일반인한테 무기를 주면 사고 위험이 크다는 게 중론이었다. 아직 실탄은 나와 소대장이 열쇠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지만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더구나 술에 절어 사는 어민이 대다수 아닌가.
예비군 훈련도 내가 맡았다. 진리 1구와 2구를 합쳐 2개 소대다. 통금단속, 선박임검, 야간초소감시, 민원처리 등에 향토예비군 훈련까지 겹쳐 너무 벅찬 업무다. 하지만 어민을 위해 모든 걸 즐겁게 극복할 작정이다.
1968. 4. 28
오늘은 음력으로 사월 초하루. 아버지 첫 삭망이다. 어제 연하가 주문진에 가서 흰 떡 한 말과 과자 과일 등을 장만해 와서 조촐하나마 제사를 치르고 안집 식구들과 함께 떡국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해가 솟아오를 즈음 태호와 둘이 산소에 갔다. 중단을 입고 건을 쓰고 태호의 손을 잡고 해변길을 걸었다. 바다는 조용했다. 이내 낀 태백 능선이 뿌연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빠, 할아버지는 묘 속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나?"
공동묘지 입구에 접어들자 태호가 재잘거린다.
"할아버지가 우리 태호 왔니? 하실 거야."
나는 눈물이 핑 돌아 그놈의 손을 꽉 쥐었다. 산소에는 따스한 볕이 깔려 있었다. 나는 봉분 앞에 종이를 깔고 밥그릇 뚜껑에 10원짜리 과자 한 봉지를 뜯어 담고 술병 마개를 열어 잔을 채웠다. 그리고 태호를 좌측에 세우고 함께 절을 올렸다. 이마에 두 손을 모았다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어린 자식이, 아빠를 곁눈질하며 실수가 없도록 절을 올리는 그놈의 깜찍한 짓이 귀엽다. 할아버지도 빙그레 웃으며 귀여운 손자의 절을 즐겁게 받으시리라. 할아버지를 불러보라고 하자 그놈은 두 번 할아버지를 부르고 나서 "대답 않는다. 죽으먼 대답 않나?" 한다. "죽은 게 아니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야." 하고 고쳐주고 나서 "할아버지가 우리애기 예뻐했지? 했더니 "응. 강릉에서 과자도 사주구 엿도 사주구....." 한다. 첫 번째 잔은 묘 앞에 세 번 나눠 따르고 두 번째 잔을 올린 다음 양지쪽을 향해 앉아 따스한 묘 흙을 매만졌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해."
산소를 떠나며 이르자 그놈은 다시 큰절을 하며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한다. 바닷가를 걸을 때에는 태호가 내 대지팡이를 끌며 분주히 따라왔다.
진리 포구에 ‘전국표준방어촌’ 설정계획이 다른 곳으로 변경되어 대통령 하사금 250만 원은 타지 못했지만 강원도 표준방어촌으로 설정되어 무기고가 이미 완공되었다. 곧 무기가 비치될 것이다. 나에게 무기고 경비 임무가 하나 더 보태진 셈이다. 그런데 경찰이 맡았던 해안 경비를 군인이 맡게 되어 그들과의 협력도 업무의 하나가 디었다. 나는 내 신변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무기고 열쇠를 지닌 채 산기슭 기와집에 살고 있으니 무장공비들의 공격목표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총을 잘 쏜다. 공군출신으로 총을 별로 쏴보지 못했지만 어제 사격훈련에서 성적이 우수한 데다 며칠 전에는 80미터나 떨어져 있던 비둘기만 한 목표물을 한방에 명중시킨 적이 있었다.
1968. 4. 29
당국의 권유로 공산주의이론 현실비판전서 6권을 읽었다.
사천면소재지에서 진리까지 총을 메고, 워커를 신고, 혼자 석양을 받으며 개울 뚝길을 걸었다.
인류는 항상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맑스 . 엥겔스-
1968. 5. 2
3시에 기상하여 선박임검을 나갔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무기고 경비 감독과 실탄정리를 시켰다. 향군을 4인 1조로 경비근무를 시켰다. 먼동이 틀 무렵 어부들이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젓는다.
1968. 5. 8
..... 조건과 환경이 같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의 문제는 필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 인간의 의지가 필연적인 것만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968. 5. 12
이곳 진리 포구에서 근무를 시작하고부터 나는 가장 충실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창작에 시간을 뺏기면서도 몸살이 날 정도로 업무에 열심이다. 그 이유를 대라면 아마 순박한 어민들과의 접촉인 데다 향토예비군이란 준특별권력관계의 조직체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도시에서의 형식적인 차드 식 근무가 아닌 실제적인 업무, 하명되는 업무가 아닌 자율적인 업무여서가 아닌가 싶다.
밤 1시경. 부락 향군 몇 사람이 찾아와 미역을 건지게 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군인들이 철통 같이 경비하고 있는 해달바위 근처로 갔다. 파도 포말에 젖지 않으려고 우비를 입고 해안경비 소속 38사단 제2소대에서 분대장으로 근무하는 김 하사의 참호를 찾았을 때는 달빛이 모래톱에 깔려 있었다. 나를 형님이라 보르며 잘 따르는 김 하사에게 재미 삼아 미역 건질 이야기를 하자 그는 50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분대원 참호를 찾아다니며 우리의 일을 알렸다. 나는 리코라이트와 실탄 30발이 장전된 칼빈총을 모래 위에 놓고 향군들과 바다에 갈구리를 던졌다. 묵직한 미역단이 끌려 나오고, 한창 신이 나 있는 판인데 난데없는 M1 총성이 귀를 쨌다. 반사적으로 우리는 모래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나는 리코라이트 전등을 흔들며 경적을 불었다. 이윽고 또 한 방이 울렸다. 먼 곳에서 김 하사가 후래쉬를 흔들며 달려왔다. 김하사는 나를 형님이라며 따르는 분대장인데 미역 건지는 이야기를 해주고 협조를 당부하니 그는 50m 간격으로 배치된 자기 분대원 참호를 찾아다니며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리코라이트와 실탄 30발이 장진된 kal을 모래 위에 놓고 주민들과 바다에 갈구리를 던졌다. 미역이 묵직하게 딸려와 신이 났다. 그때 꽝 하고 M1 소총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우리는 모래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연거푸 경적을 불며 리코라이트불을 흔들었다. 이윽고 또 한 방이 울렸다. 먼 곳에서 김 하사가 후래쉬를 흔들며 죽어라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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