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장병 제대를 일시 중단
1968. 1. 21
무장공비 청와대습격사건이 터졌다. 북한 인민무력부 총정찰국 소속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야밤에 청와대를 습격했던 것이다. 소탕작전에서 김신조가 생포되고 종로경찰서장이 순직했다.
1월 22일 정부에서 대간첩작전본부를 설치했다.
1968. 2. 1
정부에서 전 장병 제대를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눈이 자구만 흐리다. 영양관계? 과로? 아니면 근본적인 질환? 무턱대고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럴까? 과학적으로 판단할 때 역시 요령 없이 무차별한 독서 때문일까? 겁난다. 제발 귀먹어리, 벙어리, 다 좋으나 장님만은 삼가다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 나뭇짐을 삼십 리나 되는 한산장에 져다 팔러 다니신 아버지. 16세부터 온 청춘을 머슴살이로 살아오신 가엾은 아버지, 찬밥과 먹다 남은 반찬으로 새벽 끼니를 때우시던 아버지, 늙어서는 절간의 불목하니와 광산촌의 품팔이로 연명하신 아버지, 자식에게서 효도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
하이데거의「진리란 무엇인가」를 읽다.
1968. 2. 19.
오늘은 직원들과 함께 춘천교도소에 34명의 기결수를 압송하고 서울을 거쳐 돌아왔다.
1968. 2. 24
요즘은 부도수표 피의자가 입원하여 병원에서 감시근무를 하고 있어 책 읽는 시간이 많아 좋다.
웨스트버지니아대학에서 화학 공부하는 학래에게 편지를 쓰다.
...... 북괴 무장공비 서울 침투와 미 프에블로호 납북사건으로 초 긴장상태였던 내 생활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여기에서 대중이란 네가 말한 대로 가치판단이 흐려진 존재일 것이며, 스페인 출신 올떼가의 말로는 20세기에 나타난 인간상이다. 어쨌든 금세기 비인간화非人間化의 위기인 소외인간疏外人間의 원인이 과학기술에 있다면 과학자를 ‘학식 있는 무학자無學者’로 트집을 잡아도 무방할 것이다. 과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너만 빼고.
1968. 2. 26
새벽 4시. 그지없이 향기로운 초봄의 강릉 새벽거리. 초라하면서도 그렇기에 순진한 아스팔트와 가로등. 한적한 들판 건너에 환하게 켜진 전등불.....
그곳엔 역이 있었다. 어느 산협의 역, 내가 일부러 내렸던 단양역. 그 역의 정취를 지닌 강릉역. 들 건너 더 먼 곳에 동해가 잔잔한 안개를 품고 누워 있을 것이다.
새벽바람이지만 봄기운이 완연하다. 통금에 묶인 조용한 아스팔트, 한적한 들판 건너에 켜져 있는 대여섯 개의 방범등, 멀리 역사 쪽에서 증기기관차의 칙칙 소리가 들려온다. 외부동태를 잘 살필 수 있도록 사무실 등을 꺼버린 침침한 교동파출소 앞에 이르자 윤 순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쉬었다 가세요.”
유도 4단의 근육질이어서 목소리가 굵다. 불을 끈 것도 그다운 배짱이다. 우리는 난로 가에 앉았다. 그에게서 술냄새가 풍긴다.
“살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고아였다면.....”
그가 한숨을 내쉰다. 처음 듣는 말이다. 그동안 내 처지는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그는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의 병에 동정심이 느껴진다. 시팔, 가정이란 게 뭐야. 나는 맞장구를 쳤다.
“어쨌든 우린 위험한 인물이야. 내가 치안국장이라면 우리 같은 족속은 당장 경찰에서 도태시킬 거야.”
“전쟁이나 터졌으면 좋겠어.”
“나도 동감이야. 시팔.”
“무장공비 놈들이 우리보다 행복할지 모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소매를 잡는다. 그는 허무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졸랐다. 허무를 설명하다니, 나는 그냥 시간을 끌기 위해 요즘 미국 젊은 층에 유행한다는 마약중독과 비트제너레이션이란 새로운 흐름에 대해 몇 마디를 꺼냈다. 그는 차츰 신이 났다. 묘한 경찰관이다.
1968. 2. 6
프로이드의 심리학 입문을 읽다가 졸음이 와서 한 시간가량 자고 나니 의욕이 생겨 ‘패자敗者’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을 가공하면 훌륭한 장편소설이 될 것도 같다. 인간의 원시적 본능인 이드(id)는 부단히....
1968. 2. 8
쇼펜하우어의 不安과 사르트르의 불안에 대하여.
존재는 시시각각으로 줄달음치는 현재에 있으며 그래서 거기에는 끊임없는 동요가 있을 뿐 우리가 원하는 안정은 없다. 그것은 마치 중지하면 태양계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유성과 같은 것이므로 존재의 모습은 불안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불안이다.
존재의 무상성이란 엄청난 자유 속에서 아무런 지표도 없이 자기 혼자서 선택해야 되는 두려움, 사르트르는 이것이 불안이라고 한다.
1968. 2. 14
저녁 때 뒷동산에 오르다. 대관령에는 부챗살 모양의 분홍빛 노을이 드리워 있어 얼음이 녹지 않은 계곡에 어스레한 산그늘이 깔려 있다. 청량리발 급행열차가 막 진입해오고 있다. 7량의 객차를 매달고 달려온 기차는 피로에 지쳐서인지 기적소리마저 목이 쉰 듯하다. 8만 인구가 수용된 강릉시가지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다. 극장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코로나의 클랙슨 소리, 수요일 밤의 교회 종소리, 성당의 십자가, 무선국의 안테나, 역전의 지저분한 대폿집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한밤중에 건넌방에서 어머니의 주술이 들려온다. “히히힛 주여!” “밥그릇을 바꿨기 땜에 네가 잔병을 앓는다.” 어머니가 연방 떠들어댄다. 귀마저 들리지 않으니 목소리가 높다. 입을 다문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더 쓰고 싶지 않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공동묘지 골짜기에 삐져나온 유골에도 눈이 내리겠지.....
나는 탈피자脫皮者를 고안했다. 인격자人格者의 반대개념이다.
탈피자가 되는 방법은? 완전히 체면에서 벗어날 때 순수한 탈피자가 된다.
리암꾸르의「미래의 씨이저들」을 읽다.
1968. 2. 16
실존주의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아웃사이더」의 저자 콜린 윌슨의 실존적 인간상에서.
대상이 우리들의 인식에 입각한다.
- 칸트의 초월론적 사상에서
1968. 2. 17
비록 우리가 소여所與의 결과를 결정하는 원인론적인 요소를 충분히 안다 하여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질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고 그것들의 상대적인 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 프로이드
아까 퇴근시간 무렵에 벌어졌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가슬거린다. 어제 저녁 때였다. 나는 식사 교대를 마치고 수사계 빈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고용직으로 근무하는 미스 강릉 출신인 이 양이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고 금방 유치장이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얼른 유치장으로 달려갔다. 내 뒤를 따라 이내 서장의 지시로 형사주임이 들어왔다. 난동 이유를 캐본즉 7호실이 진원지였고 덩달아 전체분위기가 긴장되었던 것인데 그들의 말대로 빈껍질(돈이 없는 신입자)만 자기네 감방에 넣어주니까 화가 났다는 것이다. 즉 차별대우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빌미에 불과할 뿐 사실은 인간대접을 안 해준다는 게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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