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07회)

충남시대 2026. 3. 10. 14:30

잔아(김용만) 소설가

지식의 원리부터 익혔던 思而不學의 내 인생

 

2000. 11. 12

어제 용고 졸업 40주기 기념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반기는 동창들과 어울릴까 하다가 오후 6시에 경주로 향했다. 하지만 경부선열차가 밀려 천안에 도착하니 8시가 넘었다. 경주에 도착하면 11시가 넘을 것 같아 박덕규 교수에게 전화만 걸어주고 중부선으로 되돌아왔다. 경주에는 이문열 작가, 조남현 서울대 교수, 김원일 작가, 김국영 등 여러 명의 문인들이이 있다고 했다.
나는 진정한 문인들과만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먼길인데도 찾아갔던 것이다. 
특히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이 내 작품을 좋아한다. 80년대는 구호적인 작품이었는데 90년대의 내 작품이 구호를 육화시킨 작품이라고 격찬했던 것이다.

2000. 11. 16

홍기삼 동국대 총장이 이경협과 대학원 학생들을 데리고 왔다. 수업보다 대담을 중심으로 시간을 보냈다. 장래는 사용가치(使用價値)보다 교환가치(交換價値)가 더 우세해지는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2000. 11. 19

내가 너무 결백한 것 같다.
나는 제도권 교육이 빈약한 탓에(늦깎이 대학생이 된 탓에) 지식의 원리부터 익힌 思而不學(사이불학)의 인생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배움의 형식이 아닌 배움의 내용에 익숙한 탓에, (제도권 교육을 익히지 못해 생각만 해온 탓에) 思而不學이라고 하는 殆(공허)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學而不思(학이불사)는 罔(맹목적)이다. 殆(태)와 學만 있고 思가 없는 罔(망)!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내 말에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태호를 바보로 만든 건 내 잘못이다!     태호가 불쌍하다. 내 꾸중은 열등감만 심어주었다.

2000. 11. 22

정 서방(소령)이 국방대학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애들과 올라왔다. 파일럿도 대학원이 필요한 걸까?
시험을 치려고 3일 동안 수색에 가 있게 되어 유라와 모처럼 가정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엄마 가슴에는 응어리가 있어 그게 병이 되고 있다. 네가 풀어줘야 한다.”

2000. 12. 6

오늘부터 아내와 함께 10박 11일 예정으로 칠레와 브라질 등 남미를 다녀올 참이다. 이구아수 폭포를 관람할 때 ‘악마의 숨통’을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간 것까지 합치면 남미 3국을 다녀온 셈이다.
소설가협회 회장인 정을병씨 부부 등 19명이 남미 여행을 떠나는데 우리 부부를 최우선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정 회장 부부는 누구보다 우리 부부를 좋아했다. 그는 나를 최고의 순수작가라고 떠들곤 했다. 그래서 단체로 여행할 때는 협회에 나가지도 않는 나를 꼭 자기 옆자리에 앉히곤 했다.

오후 3시 KAL기 편으로 김포국제공항을 이륙하여 LA에 도착한 소설가 일행은 환승한 후 칠레 산티에고로 출발했다.

2000. 12. 7

산티아고국제공항에 도착 후 바로 호텔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고 아침을 먹었다. 오후에야 산티아고 시내 투어에 나섰는데 아르마스 광장, 모네다 궁전을 둘러보고 산크리스토발 언덕의 야경을 감상한 후에 저녁을 먹었다.

2000. 12. 8

  전용버스로 비냐델마르, 발파라이소 항구, 와인공장, 대통령궁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었다.

2000. 12. 9

호텔에서 조식 후 구마포초역, 오이긴스 거리를 구경하고 점심 후 산티아고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상파울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환승하여 이과수공항으로 날아가 호텔에 투숙했다.    

2000. 12. 10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이과수폭포를 구경했다. 브라질 쪽 폭포 전망대에 올라 조망 후 도보로 폭포 하단부로 이동했다. 3국 국경지대와 이타이푸 댐 등 폭포 인근지역을 답사하고 저녁을 먹었다.

2000. 12. 11

  이과수 폭포를 개별 답사했다. 과연 세계최대의 폭포답게 거창하다. 중식 후에는 이과수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과수 공항을 출발하여 상파울로를 경유 리오 데 자이네로 공항에 도착했다. 시내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었다.

2000. 12. 12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 코파카바나 해안과 이파네바, 코르코바도, 슈가로프와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리오네자이네르) 항구를 구경하고 호텔에 들었다.

2000. 12. 13

조식 후 코피카바나 해안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중식 후 리오 국제공항으로 이동하여 상파울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시내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으며 교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2000. 12. 14

조식 후 상파울로대학교 교정을 둘러보고 이피랑가 궁전, 이피랑가 공원, 부탄탄 독사연구소를 방문했다. 여장을 정리하고 상파울로 공항으로 이통하여 산디아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2000. 12. 15
  
LA국제공항 도착 후 환승하여 이튿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틀간을 꼬박 비행기에서 보낸 셈이다.

*  숫자의 작은 수
厘(리)→毛(모)→絲(사)→忽(홀)→微(미)→纖(섬)→沙(사)→塵(진)→埃(애) 등

유라네가 국방대학원에 2년간 오게 되어 일산에 아파트를 세 얻었다.

2001. 1. 30

지난 설날에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유라네와 태호네가 함께 설을 쇠는데 제사를 지내고 나서 태호 부부가 세배한다. 처음으로 아들과 며느리한테 효도를 받는 셈이다.
그 모습을 본 정 서방도 유라와 함께 세배한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오늘 유라네가 일산으로 이사했다. 준영이와 하영이를 며칠 데리고 있다가 데려다 주었다. 이제 마음 놓고 작품에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2001. 2. 23

태호가 결국 부모가 사준 덕소 고급 IPARK 38평짜리를 팔아먹고 과천에 18평짜리 월세 집을 구했다고 한다. 앞으로 경제적으로는 부자간의 의를 끊어야겠다. 집을 3번 사준 셈이다. 아파트를 잡혀서 경험도 없는 인테리어 사업에 손을 댔으니 실패는 당연하다. 최소한 10년 이상은 직공으로 일하면서 경험을 쌓은 후에 차려야 하는데 몇 달간 어깨너머로 보고 거창하게 사무실을 차려 허세를 부렸으니 누가 그런 곳에 일감을 주겠는가. 끝내 애비 말을 듣지 않는 자식! 
  
2001. 4. 1

그저께는 인천공항이 open한 날이다. 동북아의 中心공항이 열린 셈이다. 2020년까지 1억 명이 入出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2001. 5. 15

거의 2달 동안 정원에 나무를 심었다.

박사과정 동기생인 이0희한테서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서종에 왔다가 가는데 길이 워낙 막힌다며 아까 내게 전화했다고 한다. 나는 차를 돌리게 하여 한가할 때 가라고 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나보고 드라이브를 청했다. 내 차에 태워 서후리로 몰았다. 빈 우리집터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달빛을 보다가 차를 돌렸다. 무슨 심리일까? 그녀는 내 소설『속도에 관하여』를 격찬했었다.
“그런 류의 소설을 많이 쓰세요.”
그녀는 경희대 국문과에서 강의를 하다가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