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생을 사셨다죠?”
인터뷰할 때마다 신문기자나 아나운서의 첫마디는 대개 그러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이 아무리 기구해도 오이디푸스의 신탁(神託)만큼 끔찍한 팔자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아야 하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비하면 내 운명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용산고등학교 1학년 때 쓴 일기 한토막이 소름을 끼치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면 지금 당장 한강에 투신하겠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기였다. 겨우 고1생이 그따위 생각을 하다니! 그럼 나에게도 이미 가혹한 신탁이 내려진 게 아닐까? 행복을 부정한 그 가치전복(價値顚覆)이 내 신탁이란 말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운명을 타고 났기에 누구나 추구하는 행복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울고 싶어서? 그렇다. 나는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세상 아무것도 나를 실컷 울리지 못했다. 성장기의 참담한 가난, 자살충동, 비참한 노동, 늦깎이 대학생, 늦깎이 작가, 그래서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한(恨), 그런 것들은 결코 나를 제대로 울리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나를 실컷 울릴 수 있을까?
충청도 두뫼산골 초가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외아들인 내가 부모님의 묵인 하에 집을 나간 것은 시골 중학교를 중퇴한 이듬해였다. 서울구경이 어려운 시대에 어떻게 생소한 부산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대전역에서 야간열차에 무임승차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차장한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초량역에 내릴 수 있었는지, 어떻게 구내매점에서 김밥과 어묵을 얻어먹었는지. 어떻게 한국의 일류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지, 어떻게 공군 일등병이 참모총장(김구 선생 아들)을 찾아가 의가사제대를 애소할 수 있었는지, 왜 부산 태종대에 올라 바다에 투신하려 했는지, 왜 자살을 포기하고 경찰공무원이 되었는지, 왜 살인범을 압송하다 수갑을 풀어주었는지, 왜 체포된 무장공비를 자수로 옹호해주었는지, 왜 서울대학교 담당 정보형사 직을 사표내고 밑바닥생활을 택했는지, 어떻게 일용직 노동자가 3년 만에 벼락부자가 되었는지, 왜 국회의원(비례대표) 출마권고를 사양했는지, 어떻게 첫 소설집으로 ‘1993년은 김용만의 해’ 라는 평을 받았는지. 어떤 특이한 문체로 한국문단을 뒤흔들었는지, 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친 탓에 치솟던 인기가 잠잠해졌는지, 왜 국문과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직을 수락했는지, 왜 이름을 본명 김용만(金容滿)에서 잔아(殘兒)로 바꾸었는지, 왜 양평 문호리에 ‘잔아박물관’을 세웠는지, 왜 중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써오고 있는지, 왜 황량한 우주 생각에 매달려 살아왔는지.....
“여기서 은하수까지 명주실로 재면 몇 타래나 된다니?”
그런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난 바람에 나는 우주에 빠져들었고, 그 무하유(無何有) 세계에서 허무의 가치를 캘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생은 90%가 허무다. 하지만 그 허무가 생의 에너지로 작용했기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슬픔을 욕망하게 되었고, 그래서 슬플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는 고향도 여러 군데다. 충청도는 태어난 곳, 경상도는 중학교에 다니고 사업한 곳, 전라도는 대학교에 다니고 친척이 많은 곳, 서울은 고등학교와 대학원에 다니고 공직생활한 곳, 강원도는 내 문학의 샘이 있고 아내를 만난 곳, 경기도는 현재 살고 있으며 <잔아박물관>을 설립한 곳이다.
다음은 죄(罪)와 야비(野卑)에 대한 내 아포리즘이다.
죄와 야비는 다같이 타락의 일종이면서 본질은 판이하다. 토를 단다면, 죄는 한마디로 철이 없는 무작위적 타락으로서 속빠졌다, 미련하다, 순진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락이 뭔지 모르고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야비는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서 눈치 있다, 능숙하다, 약삭빠르다, 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타락이 뭔지 잘 알면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불가능하다.
색깔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가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공자도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惡似而非)”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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