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리 고택(魯恩里 古宅)은 충남 홍성군 홍북읍에 위치한 가옥이다. 1996년 2월13일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홍성엄찬고택(洪城嚴璨古宅)'이었으나, 2017년 ‘노은리 고택’으로 변경되었다.
노은리 고택은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의 외손자 엄찬이 자랐던 고택이다.(엄찬이 성삼문의 외손자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녹운서원(綠雲書院)이 건립되는 1676년 전까지 이곳에서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녹운서원은 임자년에 세웠고, 숙종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사액은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한다.
약간 높은 대지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안마당이 트이지 않는 'ㅁ'자형으로 지었다. 안채와 중앙에 안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건넌방과 안방이 있으며 대청 앞쪽으로는 부엌을 두고 부엌 상부는 누다락을 만들어서 안방에서 출입하도록 했다.
안마당이 트이지 않고 사방이 막힌 ‘ㅁ’자 집의 평면을 보면 ‘ㅂ’자 모양이 거꾸로 배치되어 정면 쪽으로 날개부분이 빠져 나온 모습이다. 이러한 평면 구조를 ‘날개집’이라고 하는데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본채는 북쪽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나머지 동서남쪽 부분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과,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으로 지어졌다. 벽은 흙벽이며 원래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안채와 안채에 붙은 익실, 중문간채만 남아있다. 익실(翼室)은 본채의 좌우 양편에 달린 방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건물의 본채가 있을 때 날개처럼 좌우 양편에 연접하는 별개의 두 건물을 의미한다. 하나의 벽을 공유하기도 하고 공유하지 않기도 하며, 보통 중앙의 본채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붕의 처마선이 겹치거나 연접한 형태의 건물을 구성한다. 노은리 고택은 배산임수의 배치로 마을 언덕에 지어졌으며 옛 양반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인근에 성삼문을 포함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노은단(魯恩壇)과 성삼문유허비(成三問遺墟碑)등의 유적들이 있다. 성삼문 유허지(成三問 遺墟址)는 성삼문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이다. 성삼문은 외갓집이 있는 노은리에서 태어났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1954년 홍성 고적현창회에서는 제단을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인근에 있는 묘는 성삼문 부인의 묘소라고 전해진다.
고택(古宅)에서 노은리 방향으로 약 1Km 정도만 가면 성삼문선생 제를 올리는 노은단이 있다. 노은리 고택을 두고 일각에서는 고택으로 보기에 일반적인 배치와는 많이 달라, 영남 북부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제사(齋舍)와 유사한 부분이 있어 구조나 건물의 특성으로 묘제(墓祭)때 사용되는 재실이었을 가능성도 두고 있다. 암튼 노은리 고택은 350년의 긴 역사를 안고 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금빛으로 빛난다. 지금은 오월, 꽃피고 새가 우는 봄날의 정취도 그윽하다 못해 아름답다. 절개를 지킨 선비의 위엄과 그 성품을 닮은 맑고 푸른 하늘을 보며 노은리 고택의 언덕을 조심스레 내려온다.
■녹운서원(노은서원):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으로 성삼문이 출생한 곳이다. 1676년(숙종 2) 사인(舍人) 이량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하였고, 1685년(숙종 11)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를 추가 배향하였다. 1692년(숙종 18)에 조정에서는 이 사우를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년(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는데, "노은(魯恩)"은 민진후(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노은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1687년(숙종 13)에 봉안하였는데,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 되었으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훼철 되었다. 충문사(忠文祠)는 한글로 편액 되어 있으며, 충문사(忠文祠) 사당 안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영정을 모셨다. 충문사는 성삼문의 시호(諡號)인 "충문(忠文)"에서 따온 것이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1418∼1456)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세조 때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 중 한사람으로, 세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시에 응시해 하위지와 함께 급제 했으며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와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우고 제도를 연구하는 등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 복위운동을 결심하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후에 성승, 하위지 등과 함께 능지처형을 당했다. 성삼문(成三問)은 대역 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1691년(숙종 17)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글ㆍ사진/ 진명희 문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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