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과 추사 김정희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생가이며,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했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추사고택은 266.11m²(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와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문을 열면 방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추사는 예산 출신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추사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난 추사는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추사 김정희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였음에 틀림없다.
□세한도(歲寒圖)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는 1844년 추사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그린 그림이다.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 송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석년(石年)과 우물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우물은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김정희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었는데,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찾았다고 한다.
□열녀문(홍문)과 백송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 즉, 홍문이 있다.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는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하였다.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 홍문은 묘막터 정문 위에 있다. 묘막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다.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 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백송은 처음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걸린 수형이었다. 두 가지는 고사하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다. 수령은 약 200년이며 높이는 약 10m이다.
□추사의 묘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추사의 묘는 고택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 묘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묻힌 묘이다. 묘에 두른 담을 곡장(曲墻)이라 하는데 왕족에게만 허용됐던 장묘문화이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은 조선 후기 서화가이자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선생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추사 김정희 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여 추사선생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도록 설립한 기념관이다.
지하1층에는 수장고, 지상1층엔 상설전시장, 영상실, 체험실, 기계실을 갖추고 있으며, 지상2층에는 사무실, 독서실, 학예연구실, 기획전시실이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복제품 81점, 진품 3점이 연중 전시되고 있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는 유명한 글이 있다. 추사가 벗인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라고 썼는데,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는 뜻이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추사체(秋史體)가 완성된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추사체의 글자를 눈여겨본다.
글. 사진/ 진명희 문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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