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맹사성 고택을 방문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고택도 많은 변모를 했다. 넓어진 주차장이며 신창맹씨비림, 맹사성 정승을 상징하는 조형물, 더불어 고불맹사성기념관과 교육관이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은 역사의 증언처럼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맞이해준다. 역사유물관은 문화해설사의 집이 되었고 유물은 기념관에 가지런히 전시 되었으니 정갈한 기념관에서 고불 맹사성을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어 관람객들은 호사를 누린다.
맹사성 고택은 1330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옛 모습을 잘 간직한 가장 오래된 집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 맹사성은 조선 전기에 문관으로 평소 검소하고 행실이 바르고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임금은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많은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조선 초 청백리로 검소하게 살아 간 모습이 고택에서 그대로 보여 진다. ‘청백리’란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이며, 청백리제는 조선개국 초기부터 실시되었으며 중종 때 정비되었고, 선조 때 선발 절차의 규정 등이 보완되면서 정립되었다.
고택의 형태는 "ㄷ"자형의 맛배집으로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로 H형 맞배지붕이며 고택 가구부(架構部)에 남아있는 고부재(古部材)와 창호(窓戶)등이 견실한 고법을 그대로 간직한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이다. 고택에서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옛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기둥에 들보를 얹어 지붕을 구성한 것이다. 삼합문이 열려 있어 고택의 내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 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맹사성이 직접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 한다.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니 은행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넘는다. 최영 장군과 맹사성, 걸쭉한 두 인물을 배출했으니 풍수 지리적으로도 최고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택 오른쪽 뒤쪽에 ‘세덕사’가 있다. 이곳은 맹사성의 조부 맹유, 부친 맹희도와 맹사성 세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閒民으로서 충절을 지켰으며 맹사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정승이다.
고택 왼쪽 뒷동산에 ‘구괴정’이 있다. 조선 초에 정승을 지낸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사람이 세 그루씩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함께 글을 읽고 국정을 살피며 백성을 위로하며 정사를 논했던 정자이다. 삼상당三相堂이라고도 한다. 정자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보며 잠시나마 생각에 잠겨본다.
고불은 성격이 소탈하였으며 외출할 때면 소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집에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
신창맹씨비림碑林들 가운데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눈에 띈다. 문학적 재능까지 돋보인 ≪강호사시가≫는 〈강호가 江湖歌〉,〈사시한정가 四時閑情歌〉라고도 한다. 작품의 배경은 지은이 맹사성의 고향인 충남 온양의 새실마을이라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을 한 수씩 노래했는데, 75수에 담긴 경험의 양상과 전개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고 이것이 겹치면서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었다. 초장은 '강호에'로 시작하여 풍성하고 너그러운 강호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도취하게 한다.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그렸다. 종장은 주어진 자연 질서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노래했다. 특히 75수의 끝에 반복되는 '역군은이샷다'라는 감탄적 종결은 강호에서 만족한 생활이 군주의 은혜로운 통치의 영역 안에 있다는 지은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악학습령 樂學拾零〉·〈청구영언〉·〈해동가요〉등에 실려 있다.
고불의 유명한 일화 중‘흑기총’에 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봄날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 큰 짐승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아이들은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짐승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 않는 고불이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들,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괴롭혔어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도망치고 난 다음 고불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소죽을 쑤어다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꼬리를 치며 고불을 따라왔다.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돌보며 주인 잃은 소를 찾아 가라고 동네방네 소문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고불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 타고 다녔다. 세종 20년(1438) 79세로 고불이 죽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죽었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고불 묘 아래에 묻어 주고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 지었다. 지금까지도 검은 소 무덤, 흑기총은 고불 묘를 금초 할 때 빼놓지 않고 벌초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글/사진 진명희 문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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