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나들이

[기획연재 고택나들이⑭] 민족의 혼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충남시대 2021. 9. 15. 12:14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으며, 한평생 고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월남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19901231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안채

이상재 선생(1850~1927)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월남(月南), 본명은 계호(季皓)이다.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써 청년운동가, 개화파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종교인 등으로 활동한 이상재 선생은 18501026일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의 16대 손으로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의 한산하고도 작은 마을에서 종9품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지낸 아버지 이희택(李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18세까지 전통적 유교교육을 받았다. 종지리 이곳은 옛 한산8경 중 건지산, 일광재, 오라릿들 등 3경을 조망하는 경관촌으로 마을의 지형이 종지를 닮아서 종지울 혹은 종지동으로 불리는 곳이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하였으며 종교가, 정치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고종 18(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고종 25(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3년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었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등이 있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다음 달 32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일본의 정치인 오자키는 월남선생을 일컬어 조선의 무서운 영감이라고 했을 만큼 기개 높은 정치가요, 지도자였다.

사랑채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생가지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 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서천군에서 복원했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생가는 충남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지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이다.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전면 지붕의 길이가 후면보다 길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사랑채의 마루를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존 마루에 나무를 덧대어 마치 계단을 연상하게 한다. 안채의 다른 건물에 아주 커다란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힘들고 불편했던 조상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본다. 곡식을 일일이 디딜방아를 이용해서 찧었으니 말이다. 요즘 세대들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는 한마디로 단순하고도 정갈한 초가이다. 하지만 주인을 닮은 듯 기품이 있다.

사랑채의 마루-나무를 덧대어 계단을 연상케 함

나라사랑 체험관과 유물전시관

나라사랑 체험관은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 실제로 살았던 생가를 복원한 초가집과 정면의 유물전시관이다. 유물전시관은 199011월 착공하여 19917월에 개관하였으며, 생전에 남기신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 전시된 유품은 서적, 신문기사, 만장, 상소문, 임명장, 사진, 가훈, 병풍, 친필 등이다.

나라사랑 체험관

1층의 전시관은 세 개의 테마(배움관, 동행관, 등불관)로 이루어져 있다.

배움관은 이상재 선생의 탄생과 박정양을 만나 주미 서기관으로 미국과 선진문물을 접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동행관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개회하는 등 개화의 일익을 담당하고 YMCA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계몽운동에 힘을 쏟은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등불관이다. 이상재 선생이 남긴 언어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을 돌아보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애쓰신 선생의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특히 청년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것 같아 새삼 숙연해진다. 지난 329일엔 이상재 선생 제94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 업적은 영원히 기억되어 역사와 함께 길이길이 흐르고 있다.

. 그림/ 진명희 문화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