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나들이

[기획연재 고택나들이⑮]농촌소설의 대표작『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沈勳)과 필경사(筆耕舍)

충남시대 2021. 9. 15. 16:40

 

심훈(沈勳)

심훈(19011936)은 경기도 시흥에서 출생(시흥군 북면 흑석리 176번지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177번지로 지번이 통합된 상태이다. 생가 터엔 현재 흑석동천주교회가 들어서 있다)했으며,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다. 1915년 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으로 투옥되어 퇴학을 당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21년 항저우[杭州]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입학, 192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19255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하고 6개월 뒤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1923년 귀국 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였고, 1928년 조선일보기자로 입사해 영화 평론으로 프로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에 힘을 쏟았다. 1933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으며, 19358월 최용신의 실화와 자신의 농촌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동아일보 발간 15주년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었다. 19366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고자 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1926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 1930년 조국 해방에의 염원을 노래한 시 그날이 오면이 있다. 1935년 장편소설상록수를 비롯하여 직녀성,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등과 단편소설 기남(奇男)의 모험, 오월비상, 황공(黃公)의 최후등이 있으며, 1952심훈전집(7)1966심훈전집(3)이 발간되었다.

필경사(筆耕舍)

1934,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 당시 부모님이 살고 있었던 고장 당진으로 내려와 글을 쓰기 위해 직접 설계해서 지은 일()자형의 단아한 건축물로 필경사라는 당호를 붙였다. 필경사(筆耕舍)의 뜻은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필경사는 충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으며,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이 집은 대문이나 부속채 없이 자형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앞쪽에는 최근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했다. 필경사의 평면은 정면 5, 측면 2칸의 초가집이어서 외관으로 보면 전통적인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부 평면은 1930년대 도시주택의 기능에 맞추어 생활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칸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횡으로 2칸 반을 터서 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 뒤편 한쪽은 안방이고 다른 한쪽은 현관 뒤쪽 한 칸과 합쳐 부엌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2칸의 부엌 중 한 칸은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택의 서측에는 앞뒤로 길게 반 칸을 나누어 두 개의 화장실과 하나의 욕실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화장실은 외부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내부의 화장실과 욕실은 안방을 통해 사용하도록 하였다. 욕실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주택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을 둔 평면구조는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화강석을 대충 다듬은 사괴석(사방 6치(18cm) 정도의 방형 육면체의 화강석으로 궁궐의 담장이나 격식이 있는 사대부의 집에서도 사용)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한 단 높이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 역시 사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방형 기둥을 쓰고 기둥머리는 보와 도리를 기둥에 자로 끼우는 사개맞춤으로 짜 올렸다.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우진각 지붕이어서 서까래는 부채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로 배열하였다. 다만 모서리의 추녀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있다.

전면과 측면에는 유리창을 달아 전통적인 세살창을 단 것보다 내부를 밝게 처리하였으며, 밖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각 방면에 두고 있는데 현관을 비롯하여 부엌, 안방, 그리고 사랑방에 각각 문을 두었다.

이 주택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설계는 당시 도시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형태 중에서 화장실과 욕실을 실내에 설치해두는 형식을 따랐다. 또한 유리창을 달아 내부를 밝게 처리함으로써 전통주거의 실내와는 다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마루방과 사랑방 외부에 작은 베란다를 설치하여 화분을 놓도록 배려한 것은 설계자의 섬세한 마음을 엿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모습은 농촌마을 경관에 어울리게 한국의 전통적인 외관을 유지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20149월 심훈의 유물 등이 전시된 기념관도 문을 열었다.

심훈기념관

심훈기념관은 소장 자료와 유물의 전시, 관람업무 및 소장품의 보관, 진열, 수리, 모사, 복원 등 심훈의 생애 및 업적에 관한 자료의 수집, 조사, 연구 등을 맡고 있으며 심훈의 문학성 조사연구 및 문학에 관한 교육운영이 주요업무이다. 또한 기념관은 민족의식의 태동, 저항의 불꽃, 희망의 빛, 그날이 오면이란 주제로 기승전결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필경사 우측에는 경기도에서 이장하여 이곳에 안착된 심훈의 묘가 있다. 심훈은 천재소설가이며 영화예술인, 시인, 독립운동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 사진 / 진명희 문화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