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생가지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13년 2월 18일 이곳 공주군 신상면 (현재 유구읍) 유구리 427번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보통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유년기를 이곳 공주 유구에서 지냈으며, 부친 김승환씨가 이곳에서 태어나 직장생활을 제외하고는 살았다는 곳은 분명하다.) 지금의 주소는 공주시 유구읍 창말 안길 11-13이다. 앞으로는 유구천이 유유히 흐르고 뒷산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창말 안길 마을이다.
칠월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날, 김화백의 생가지를 찾았다. 큰 길에 높이 세워진 ‘운보 화백 생가지’란 푯말을 따라 골목을 들어섰다. 골목길은 잘
정돈되어 깨끗했고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조용했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찾은 김화백의 생가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실망이었다. 파란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허름한 담장너머로 들여다 본 생가지는 비닐하우스만 덩그마니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마당엔 풀들만이 무성했다. 대문 앞에 안내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운보 생가지란 것을 그 누구도 알 턱이 없다.
안내판에는 ‘운보 김기장 화백 집터’라고 명명되어 있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집터는 1950년 때까지 ‘감나무 집’으로 통했다. 초가집의 문간채, 사랑채, 안채, 헛간채와 나무울타리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감나무만이 남아 생가지를 지키고 있을 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보의 생애와 작품
김화백의 호는 어머니가 지어준 아호 '운포(雲圃)'를 사용하다가 해방 직후 일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로 囗를 떼어버리고 '운보(雲甫)'로 바꿨다. 김 화백은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릴 때 외할머니가 해준 인삼을 먹고 더 열이 올라 결국 귀가 멀게 되어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수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했다. 이때부터 김화백은 일생동안 창각장애인으로 살았다.
김화백은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고, 학창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 교과서에 낙서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어쩌면 귀가 불편하면서부터 미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재능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1930년 보통학교 졸업 후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헌(洛淸軒)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낙청헌에 입문한지 6개월 만에 스승 김은호의 영향과 총애를 받아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으로 입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낙청헌에는 김은호에게 사사를 받고자 김기창 외에도 김인승,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이 동문수학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작품인 <전복도>(1934)와 <가을>(1934). 김은호의 화풍과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중일전쟁부터 각종 미술대회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그림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전시체제 때 이러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이후 종래의 일본화의 경향에서 탈피한 작품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52~1953년의 <예수의 생애> 시리즈가 주목을 받았다.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부활까지의 장면을 총 30점의 연작으로 제작한 것이었는데, 특이하게도 화풍뿐만 아니라 외모나 복장, 배경 등을 모두 조선조의 것으로 바꿔 그려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종교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현지화 하는 과정은 다른 종교 및 문화에서도 흔하지만, 한국에 유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 이야기를 이렇게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것은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김화백은 본래 개신교(감리회) 신자였으나 1985년 딸이 가톨릭 수녀가 된 것을 계기로 가톨릭으로 회심, 김수환 추기경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문자도나 동물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특히 말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추상화 작품을 그리기도 했지만 이때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 민화의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의 이른바 '바보산수'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적인 작품들만을 그리던 초기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본인은 이런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푸른색을 산의 전면에 칠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청록산수' 연작을 그렸고, 1990년대 초반에는 고령의 나이를 무릅쓰고 봉걸레를 먹에다 찍어 대형 화폭에 그린 '점과 선 시리즈'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김화백은 일생동안 작품세계가 자주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작품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시도에서 모두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돌아가실 때까지 약 1만 5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하니 과히 대한민국 미술계의 거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47년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를 지냈고, 백양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0년 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단과 교육계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고 그 외에도 1950~60년대 초반까지 만화가로 활동하여 <학원>이란 어린이 잡지에 이야기 그림 형식의 만화작품을 비롯해 어린이 만화책 <허생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71년 제12회 3.1 문화상이 있으며, 1972년과 1977년 3.1문화상 심사위원에 위촉되었고, 1977년 은관문화훈장,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 1983년 예술원상, 1986년 '5.16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 '1987년 '색동회상'등을 두루 수상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수상과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또한 역사인물의 표준영정과 민족기록화를 도맡아 그렸는데 특히 이 중에서 1973년에 그린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은 현재 한국은행 만 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운보의 집」과 운보미술관
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 92-41), 이곳은 어머님의 고향으로 1976년 부인 (故 우향 박래현 화백)과 사별한 후 1984년 운보의 집을 완공.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노후를 보낸 곳이다. 우리고유의 전통양식인 한옥으로 안채와 행랑채, 정자와 돌담, 연못이 조화를 이루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전통한옥이 잘 어우러진 문화예술공간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고백, 과거행적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세도 보였다고 한다. 1995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조용히 요양하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사후 「운보의 집」은 그의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 겸 공원으로 개조해서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김화백과 부인 박래현의 묘소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글. 사진/ 진명희 문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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