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던 유관순열사의 조국애와 민족애는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유관순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그곳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숨겨 귀향 후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오후 1시 3천여 장꾼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유관순 열사와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대표로 서울에서 숨겨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후 유관순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날 저녁 유관순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 쳤으며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 유관순 열사는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 열사는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유관순 열사는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다. 함께 재판받았던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주도자들은 재판결과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유관순 열사는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10월 12일에서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 인수하였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유관순 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기념관으로 유관순 열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4월 1일 설립되었다.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이며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 등본, 재판기록문 등의 문서자료와 디오라마 모형, 패널,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전시한다.
전시실은 관람 순서에 따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부조, 연보, 유관순 열사의 생애, 국내외 3·1운동, 끌려가는 유관순 (모형재현), 서대문 경찰서 벽관 체험, 독립이미지, 재판 과정과 옥중투쟁 매직비전 영상, 유관순 열사 관련 자료, 천안의 독립운동, 열사의 삶과 죽음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아우내 만세운동을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는 80석 규모의 영상실, 역사퀴즈 체험 공간, 태극기 스탬프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 외부에는 2003년 4월 1일 유관순열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관 개관과 함께 제작된 타임캡슐이 비치되어 있으며 유관순 열사 관련 자료, 천안 시정 관련 자료 등을 포함하여 50종 70여 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02년 4월 1일 개봉 예정이다.
경성복심법원 유관순 재판기록문, 제적등본, 수형자 기록표, 1920년대 성경책, 공주지방법원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주요인물의 재판기록문, 유관순 열사가 손수 뜨개질한 모자, 한국화가 윤여환(1953~)이 그리고 2007년 2월 28일에 봉안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등이 있다.
글ㆍ사진 / 이해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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