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7회)

충남시대 2023. 12. 19. 14:18

훗날 국회부의장 아내가 된 여중생


1958. 11. 5

  이승만 대통령이 월남 고딘디엠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데 우리 학생들은 도로변 환송에 끌려갔다. 용산고는 한강대교 양쪽 인도가 담당구역이었다. 

  밤에는 섬진강 유역인 구례에서 농촌계몽운동할 때 계몽대장이었던 백기완 선배를 원효로 집에 찾아갔다. 그는 나보고 향토녹화대나 문화단체를 조직하라고 했다. 나를 퍽 아끼는 분이고 나는 그를 내가 조직한 청진회(靑進會) 고문으로 추대했다. 청진회는 四大 公立高인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에서 각각 2명식 선정한 학생모임이다. 

  내가 고교시절에 만난 백기완 형을 다시 만난 것은 35년이 지난 후 내가 첫 소설집『늰 내 각시더』를 출간했을 무렵이었다. 내 작품은 중앙지, 지방지 할 것 없이 전 매스컴에서 톱으로 다뤘고 ‘1993년은 잔아의 해’ 라는 평을 받을 만큼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세미나가 열리고 있을 때였다. 중앙일보 기자가 동석한 백기완 선배에게 이분이『늰 내 각시더』작가라고 소개하자 백기완 선배가 내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사람이 내가 말했던 잔아(김용만)야!”

1958. 11. 15

  어제는 청진회 회원 중 남고생 9명 여고생 2명이 모였다. 백기완 청진회 고문도 참석했다. 중국요리를 시켜먹었다. 
  밤에는 푸치니 작품 오페라 <토스카>를 보러갔다.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들으면 내 영혼은 미치고 만다. 소프라노 김자경과 테너 이인범 등이 출연했다.  

  고독은 인간 자체다.      -릴케
  나는 문학과 철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다음은 내 적성검사 결과다. 미술(46) 음악(41) 문학(41) 생물과학(15) 물상과학(30) 실업(32) 정치(48) 사회(47) 사무(33) 운동(27)
  
  
1958. 12. 11

  보안법을 반대하는 전국언론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요즘 유행으로는 훌라후프, 한글간판, 텔레비전 설치가 번지고 있다.   

  사상은 우주를 지배하고 인간생활을 꿰뚫는 하나의 의지를 지녔다고 한다. 이것을 내재의지(內在意志)라고 한다.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는 캄캄한 허무에 도달하지만 하디의 의지는 테스에 나타난 것과 같이 투명한 자각에 도달한다. 


1959. 1. 15

  새뜸 초가집 셋방에서 겨울방학 숙제를 정리하고 있는데 교복 차림의 여중생이 찾아와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혜연의 여동생(훗날 국회부의장 아내)이었다. 쪽지 내용은 간단했다.  

  “상경하기 전에 오늘 밤 만나실까요? 장소는 학생이 정하세요.”

白雪

  나는 월명산에서 만나자는 의향을 여동생에게 알려주고 밤을 기다렸다. 어둠이 깔리자 서둘러 월명산에 올랐다. 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능선에 있는 바위를 찾아갔다. 바위틈에는 누런 잔디가 깔려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앉아 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윽고 산 아래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얼른 기슭으로 내려가 혜연을 부축해서 데려왔다. 내 코트를 벗어 바위틈에 깔고 혜연과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살갗이 맞닿은 곳은 이야기 도중 무심결에 닿은 뺨 한쪽뿐이었다. 

  먼 훗날 조성구 박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혜연이 포옹을 바라고 밤에 산에서 만나자고 쪽지를 보낸 게 아닐까?”
  나는 조성구의 말에 수긍이 갔다. 포옹을 바라지 않았다면 여동생 편에 쪽지를 보내지 않았을 테고 대화만 나누고 싶었다면 영학이네 집에서 조용히 만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때 월명산에서 혜연과 몸을 섞었다면 내 생은 어떤 형태로 변했을까? 혜연과 행복한 생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내 창작생활은 가능했을까? 생활 걱정이 없으면 평범한 생을 살았을 텐데 그래도 창작생활이 가능했을까?”
  “혹 정치판으로 흘렀을지도 모르지. 너는 혈액형도 B지만 웅변도 잘했잖아. 전국학도웅변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니까.”
  “몸을 섞었다면 혜연과 결혼도 가능했을 테고, 그랬다면 내 생이 지금처럼 비극적일까? 비극적이어야 명작을 쓸 수 있을 텐데?”
  “명작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천사 같은 아내 여수니를 만날 수 없었겠지.”
  “맞아. 첫사랑에 대한 추억담도 쓸 수 없을 테고.”
  다음은 그 겨울밤의 추억을 소재로 쓴 콩트 전문이다.

돌아온 그림자
  
  식목일 무렵이었다. 작업복 차림에 땀을 흘리며 인부들과 정원수를 옮겨 심는데 60대로 보이는 낯선 두 여인이 다가왔다. 단아한 외모와 공손한 인사 태도로 보아 아무리 바빠도 건성으로 대할 손님이 아니었다. 내가 집 주인임을 밝히자 그 중 한 여인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장애지 에밉니다.”
  그제야 두 여인을 서재로 안내하고 가정부에게 커피를 준비시켰다. 나와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는 장애지 교수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강의실에 들어갈 만큼 발랄한 성격이면서도 아버지뻘인 나를 무척 따랐다. 언젠가는 우리 농장에 놀러와서 오후 내내 술을 마시며 잡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녀가 추억담을 요구하는 바람에 나는 첫사랑에 얽힌 비화를 소상히 풀어놓았다.  
  “그동안 딸한테서 선생님 말씀을 자주 들었어요. 오늘 일하시는 걸 보니 선생님은 매사에 적극적이시군요. 제 딸은 선생님을 뵐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어요.” 
  “저처럼 무딘 사람한테서 충격을 받다뇨. 솔직히 저는 책보다 삽을 들어야 마음이 더 편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따르는 장 교수가 기특하죠. 디자인을 전공한 첨단 여성이 늙은 농투성이를 따르다뇨.”
  “그 애도 시골서 자랐거든요. 참 인사소개가 늦었네요. 제 언니에요. 네 살 턱이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얼굴이 유난히 희고 여린 탓인지 오히려 동생보다 젊어 보였다. 내 인사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답례를 차린 언니는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내 이야기에 표정으로만 반응을 보이다가 이따금 미소를 짓곤 했다. 언니가 그처럼 침묵을 지킨 탓인지 동생은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를 썼다. 의도적으로 말수를 늘려가더니 급기야는 민망한 말까지 꺼내고 말았다.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요. 우리 세대로서는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고전이죠. 이제 어디서 그런 감동 어린 체험담을 들을 수 있겠어요. 언니도 그 이야기를 듣고 눈자위를 붉혔지요. 사실은 언니가 먼저 선생님을 뵙자고 졸랐거든요.”
  나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줬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대중가요 중에서 가사를 외운 건 ‘연상의 여인’뿐이죠. 혜연은 저보다 두 살 위였어요. 고향 이웃 마을에 사는 여대생인데, 미인박명이랄까. 신은 자신의 창조물에 질투를 느끼는 경우가 있나 봐요.”
  나는 혜연과의 관계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려주고 그녀가 죽을 무렵의 심정을 감동 어린 톤으로 엮어내기 시작했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한 여중생이 종이 쪽지를 들고 찾아왔어요. 언니가 써준 메모였지요. 오늘 밤 늦게 월명산에서 만나자고 씌어 있더군요. 그 시절만 해도 마을의 이목이 두려워 함부로 만날 수 없었죠. 더구나 지방 유지의 딸과 비천한 농투성이의 아들이 어울린다면 얼마나 말이 많겠어요. 저는 산 능선까지 단숨에 뛰어갔죠. 약속 장소인 쌍바위 틈에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는데 산 반대편 기슭에서 인기척이 들리더군요. 급히 내려가 혜연을 업으려했지만 막무가내는 바람에 부축해서 올라왔어요. 혜연은 폐를 앓고 있었죠. 나는 능선에 서 있는 쌍바위 틈에 외투를 벗어 깔고 그 자리에 혜연과 나란히 앉았죠. 밤이 깊어지면서 눈보라가 극성을 부려도 바위틈은 잠잠했어요. 우리는 새벽녘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고, 포옹하려는 순간 혜연이 각혈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허공에 대고 울부짖었죠. 생즉기(生卽奇), 살아 있는 것이 기현상이라고 외치며 각혈이 흥건한 혜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볐어요. 함께 죽고 싶었던 거죠.” 
  “혜연씬 그후 어찌됐나요?”
  모처럼 언니가 입을 열었다.
  “이듬해 봄에 세상을 떠났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은 심정이 어떠세요?”
  “그 애절한 고통이 지금도 제가 살아가는 힘이 돼주고 있습니다.”
  나는 혜연과의 기막힌 사랑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 스토리로 장애지 교수를 감동시켰듯 두 여인을 감동시킬 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동생이 내 얼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거짓말을 참 잘하시네요.”
  “네?”
  “혜연씨는 폐병을 앓은 적이 없으니 각혈할 리가 없죠.”
  “그게 무슨 말씀에요? 혜연은 폐병으로 각혈하다 사망했는데요?”
  “추억담을 너무 비극적으로 꾸미다보니 죽은 걸로 착각하시는 거에요.”
  “그걸 어찌 아시죠?”
  “이 언니가 바로 혜연 씨에요. 제가 겨울밤에 쪽지를 전해드린 여중생이고요.” 
  “그럼 댁이 바로 혜정씨?”
  장애지 교수 어머니는 한바탕 웃고 나서 말을 보탰다. 
  “딸애는 선생님이 꾸며내신 스토리가 너무 감동적이라며, 제 이모를 ‘돌아온 그림자’라고 놀려대곤 하죠.”
  돌아온 그림자, 그렇다. 46년 전에 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여자가 마치 환영처럼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혜정의 웃음과는 달리 혜연의 눈자위에는 어느새 물기가 젖어있었다.

출처 : 충남시대뉴스(http://www.icns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