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9회)

충남시대 2024. 1. 9. 13:51

윈스턴 처칠의 문학정서와 제2차세계대전


1960. 7. 29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의석수 219개 중에 민주당 172석 차지했다.


1960. 8. 8

  제2공화국 양원(민의원 ⸳ 참의원) 첫 개원일이다.

  셋방 안집에서 수박을 가져왔다. 100환이면 수박을 즐긴 텐데, 부모님이 원망스럽다. 왜 홍산쯤에 사시겠다고 농토를 파셨는지! 왜 그 돈을 양자 간 형에게 빼앗겼는지! 앞으로 부모님의 생활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새뜸과 탑시부락(무쇠점)에 놀러 가셨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고추, 파, 무청, 나물 등이 들어 있는 보따리 속에서 민주의 편지를 꺼내주신다. 
  “나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남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몰라....”  
  몸을 섞어온 민주가 가엾다. 마음은 혜연에게 가 있는 내가 저주스럽다. 왜 혜연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던가! 

  성서를 읽었다.
  -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예수


1960. 8. 31

  부정축재자 46업체에 탈세 통고하다. 
  벌과금 87억 환. 추징금 109억 환.
  
  새뜸에서의 어린 시절이 내 생의 황금기였다. 장마철에 깊이 파인 웅덩이에서 벌거벗고 자맥질하는 재미는 일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웅덩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하셨다. 물속이 얼마나 깊은지 명주실로 한 타래나 된다고 공갈을 치셨다. 겨우 1m 남짓일 텐데 명주실 한 타래 깊이라고 말씀하신 그 공갈은 바로 자식사랑이었다. 
  가뭄이 지독한 어느 해였다. 호수가 말라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호수를 뒤덮었다. 나도 발바닥에 밟히는 붕어와 잉어를 신나게 잡아 버들가지에 꿰곤 했다. 물고기 이십여 마리를 잡아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그 아까운 고기를 모두 콩밭에 버렸다. 모처럼 온 식구가 포식할 수 있는 토실토실한 고기였다. 아버지는 고기가 아까우면서도 호수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그 자식걱정 때문에 일부러 화를 내셨던 것이다. 


1960. 9. 20
  
  나는 타락하고 불량배가 될 환경이었다. 그랬어야 정상적일지 모른다. 그러한 내가 이토록 참된 길을 지향하는 데에는 내가 지성과 진실에 목 매이는 강인한 정신 때문이다. 
  주여! 제 어머니께 다른 정신을 넣어주소서!
  숱한 세월을 나는 어머니 잔소리에 멍들어왔다. 어머니, 어째서 당신은 효자를 불효자로 만드십니까! 
  아아 나는 어째서 고아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차라리 아버지와 단 둘이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감각에 알맞은 일을 금했다.    -파스칼-
  극기할 수 있는 자에게 어려울 것이 없다.    -디스렐리-
  자유와 자결권에 헌신함으로써 이들로부터 존경과 우의를 획득해야 한다.      -케네디
  나는 깊다. 그 깊은 곳을 더욱 깊이 살펴보자. 끝없는 無限과 만나리라.    -잔아(김용만)


1960. 9. 22

  윈스턴 처칠의『나의 사상 나의 모험』을 읽었다. 영국 의회정치가 발달한 것은 통치자들의 문학정서 덕택이다. 전 유럽이 나치에 점령당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유머와 기지로 국민을 안심시키고 단합시킨 처칠의 업적도 문학정서의 위력이었다. 그는 회고록『제2차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 전의 수상인 그래드스톤 역시 인문학적 소양이 다분했으며, 디스렐리 수상 역시 문필가로로도 유명했다. 디스렐리와 아내 안나와의 깊은 사랑은 전설적인 부부애로 칭송받고 있다. 16세 연상인 안나는 남편의 의정활동이 늦을 때는 마차에 도시락을 지니고 의회에 나갈 정도로 내조가 지극했는데 디스렐리 수상은 아내가 죽은 후에도 무덤에서 소일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 나는『디스렐리전』을 완독 한 바 있다.

      
1960. 9. 27
    
  보리밭 샛길을 해진 고무신을 신고 걸어가는 한 농민을 본다. 초라한 그 농민의 손에는 흑고무신 한 켤레가 들려 있다. 그 고무신에서 행복감이 느껴지는지 제법 명랑한 표정이다. 분명 자기 가족에게 줄 유일한 추석 선물인 셈이다. 그이네 식구들은 우리 집처럼 쇠고깃국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선물인 동시에 하나의 과제다.... 제도는 잡다한 시장거리와도 같고 감정은 온갖 흥미로 가득 찬 여인의 방과 같다.      - 마틴 부버
   
  
1960. 9. 30

  홍산 단칸 셋방에서 추석 명절을 맞았다. 우리 집 세 식구에게는 기다려지지 않는 명절이다. 아침은 시래기무침과 시래기된장국으로 때웠다. 아침을 먹으며 눈만 끔벅거리는 어머니, 말없이 수저만 드시는 아버지. 고기는 반 근도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제사도 못 지냈다. 나는 혼자 뒷산에 올랐다. 
  오후, 밖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얼굴이 발그레하다. 옆집에서 약주를 드셨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의 취한 얼굴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일에든 종결을 지어라. 작은 일부터 해라. 나는 마당에 있는 것 치지 않고는 잠 안 온다.... 돈은 쓸 데 써라. 그것이 실속인 거고 큰일도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정치 이야기를 했다. 정당, 대통령, 내각책임제, 아이젠하워 대통령, 후르시쵸프 소련서기장, 닉슨, 케네디 이야기, 그리고 사탄에 대한 이야기도 해드렸더니 무척 즐거워하신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서울 다니신 이야기, 창경원 비원, 남산 이야기를 하시고 화신에서 엘리베이터 타신 이야기도 하신다.

1960. 10. 6

  아버지와 둘이 새뜸에 갔다. 가는 도중 나는 웅변 연습을 하고 아버지와 떠들었다. 내 웅변술이 놀랍다. 진둥재를 넘으니 마침 내 모교인 지산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혜연이 군산에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뜸 민주네 집에서 혜연을 만났지만 할 말이 없었다.   
  
 
1960. 10. 29

  민주가 홍산 우리 셋방에 와서 같이 있는데 혜연이 누나 친구인 문희, 길자 등과 함께 홍산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혜연이 나를 만나기 전에 미장원에 들렀던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막걸리를 마시고 취한 얼굴로 혜연을 만났다. 간단히 몇 마디 인사만 나누고 나는 혜연의 등을 슬며시 밀었다.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허망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내 절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어느 날 혜연과 함께 눈 속을 헤치며 홍산장에 다녀오던 추억이 살아났다. 그때 혜연의 얼굴에는 나에 대한 그리움과 민주에 대한 은연한 질투가 젖어 있어 몹시 괴로웠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시 못한 혜연이 원망스럽다. 

1960. 10. 30
  
  아버지의 말씀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한때 호강하게도 못 살고.... 내 집에서나 죽어야 할 틴디 남의 셋방에서....”
  오오 하나님이시여! 제발 아버지의 건강을 지켜주소서!
  
  니체의『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다.


1960. 12. 9

  오후 두 시경 명동 시공관에 몰래 들어갔다. 아직 무대가 설치 중이었다. <오셀로> 간판만 세워져 있었다. 텅 빈 홀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니 KBS 교향악단이 자리를 잡으며 조명이 비친다. 누가 와서 “표 샀소?” 하고 물을 것만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2년 전 가정교사 집에서 얻어 신은, 개가 물고 다닐 정도로 낡은 구두를 신고, 살이 부러진 우산을 쥔 내 모습이 가엾다. 김자경, 김학근, 채리숙, 이인범이 나타나며 리허설은 고조에 달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관객이 차고 막이 오르며 박수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