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8회)

충남시대 2023. 12. 27. 14:54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59. 1. 26

  이승만 대통령이 4선 출마용의를 표명했다. 시국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어제는 <반공청년단>이 결성되었는데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대단하다.


1959. 4. 9

  “만약 당신과 헤어지게 되면 그건 커다란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나를 성공시킬 것이며 그 성공은 내게 하등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 혜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1959. 8. 9

 민호(훗날 화공과 교수)와 함께 신흥대학교(훗날 경희대학교)로 상대 형을 찾아갔다. 민호는 서울대 공대에 들어가 미국에 유학가겠다고 말했다. 청파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놀고 지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흥인(훗날 외과의사)과 둘이 한강 백사장으로 목욕하러 갔다.

  나는 70 노령에 고생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 결투하세요. 버림받으면 안돼요!”


1959. 8. 12

  “하눌님, 부처님, 신령님, 우리 아들 천복을 타게 하소서! 열 몫 백 몫을 하게 하소서!”
  공부할 때마다 어머니 주술 때문에 또 싸운다. 징그럽다. 가난해도 좋고 빌어먹어도 좋다. 어머니만 아니면 행복하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주술과 잔소리에 멍들어왔다. 지긋지긋한 어머니 주술!

  인류문화의 형성에 있어서 물질적인 비중이 크다는 것은 맑스의 추종자들보다 유물론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막스 베버  
 

1960. 1. 3
 
  부모님 걱정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귀향했다. 군대생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국방의무를 마쳐야 마음 놓고 품팔이할 수 있었다.
  혜연이 소식은 감감한데다 사실 만날 수도 없다. 대학을 포기한 상태이니 창피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일수록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다. 농촌에 묻혀지내니 하루하루 존재감이 소멸되어간다. 게다가 홍산 셋방에서 기거하고 있으니 기를 펼 수도 없다. 겨우 글 쓸 욕망이 생명을 부지해주고 있다.

  * 

  1월 15일 이후 7월 17일까지의 일기가 지워졌다. 먼 훗날 육필을 사진으로 찍어 ‘아래하한글’로 보관했는데 날아간 것이다. 무엇보다 4.19 무렵의 일기가 날아가 가슴 아프다. 그래서 자료를 통해 간단히 날자 별로 제목만 나열했다.


1960. 1. 15
  육군 군수기지사령부가 신설되었다. 사령관은 박정희 소장.

1960. 2. 15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 중 사망했다. 2월 20일 유해가 도착해 2월 25일 국민장을 치렀다. 

1960. 2. 28
  대구 경북고 학생들 800여 명이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일으켰다.

1960. 3. 15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속칭 <3.15부정선거>를 치른 탓에 1차 마산데모사건이 터져 7명이 사망했다. 

1960. 3. 17
  서울 성남고교생 400여 명이 마산사건 진압에 대한 항의로 데모했다.

1960. 3. 18
  민주당에서 선거무효선언문을 낭독하고 퇴장했다.

1960. 3. 22
  장택상 의원이 대통령에게 생일선물로「하야권고문」을 신문지상에 공개발표했다.

1960. 4. 11
  제 2차 마산유혈데모가 발생했다. 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인양된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사체 인양을 계기로 마산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일 동안 데모가 이어졌다.

1960. 4. 18
  서울에서 고려대생들 데모 중 종로에서 깡패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1960. 4. 19 
  4월혁명의 날! 피의 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 선포. 육군 15개 사단 서울 진주했다.

1960. 4. 25
  서울시내 각 대학교 교수단 400여 명이 계엄 중에 데모를 결행했다.

1960. 4. 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하다.

1960. 4. 28.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내각수반에 허정.
  이기붕 일가 참변.

1960. 5. 2
  국회의장에 곽상훈.
  곽 의장은 청빈한 정치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분의 젊은 아들 문제로 통화한 적이 있는데 과연 존경받을 인품이었다. “그놈을 몽둥이로 패소.”

1960. 5. 29
  이승만 하와이 망명길에 오르다.

1960. 6. 19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한국 방문. 1952년에 이어 2번째 방문인 셈이다. 우리 공군기 21대의 호위를 받으며 김포공항에 안착. 서울 거리에 100만 인파가 몰릴 정도로 온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60. 7. 17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정치적 중립을 선서했다.


1960. 7. 21

  오랜만에 상경했다. 외국어대에 다니는 원지하의 소개로 영화배우 황남 씨의 아들 가정교사로 입주했다. 한옥인데 대문입구에 있는 깔끔한 방이 내 방이다. 난생 처음 깨끗한 방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교육은 정신적 교양을 중점 지도할 작정이다. 황 씨의 집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최은희와도 영화를 함께 찍은 적이 있다. 부인도 내게 잘 해준다. 나는 모처럼 사람 살아가는 모양새를 갖추고 지내는 셈이다. 

  처음으로 씨나리오를 써본다.  
  쌀 가마당 13410환


1960. 7. 24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교회에 간다. 교회의 간판도 목사도 모른다. 절차가 싫다. 형식이 싫다. 그저 기도만 있는 종교면 좋겠다.

  종일 보들레르와 <思想界> 7월호를 읽었다.
  한심한 민주당이다. 4.19가 아깝다.
  가정교사집 아주머니가 남편이 신던 헌 구두를 약칠해서 준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내가 딱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