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46회)

충남시대 2024. 10. 29. 13:51

육영수 여사 문세광이 쏜 유탄에 맞아 서거


1973. 12. 3

  이후락(대통령 비서실장) 남북조절위원회 서울 측 공동위장을 사임하다.
  지난 11월 8일에는 영동선이 개통되었다.

1974. 1. 8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1호(헌법논의 금지)와 긴급조치2호(비상군법회의 설치)를 선포했다.

1974. 6. 10

  공장에서 종업원이 밤에 주차한 승용차에서 휘발유를 빼먹다가 기름통이 연탄아궁이에 흘러 큰 화재가 발생했다. 공장시설은 물론 고급승용차를 포함하여 승용차 5대를 태웠다. 어느 기사는 불타는 차를 꺼내자 소방차가 뒤따라가며 호스를 들이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불타는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대구에 근거도 없으니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면 그만인데 양심대로 저축한 돈으로 모든 피해차량에게 변제해주고 나니 다시 거지가 되었다.

1974. 6. 13

  점심은 굶고 저녁은 콩나물밥을 간장에 비벼먹었다. 품팔이할 곳을 찾아야겠다. 나한테는 딱 맞는 직업이다. 아내가 꿔온 쌀로 밥을 했는데 태호와 유라가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새벽 4시, 마음을 달래려고 안톤체홉의 『귀여운 여인』을 읽었다.
  올렌카가 내 아내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1974. 6. 29

  70년대 중반에도 명덕로터리 주변에는 남문시장 쪽으로만 집이 몇 채 들어서있고 거의가 논밭이었다. 계명대 쪽 도로변에도 거의가 들판인데 로터리에서 100여 미터쯤 떨어진 도로변 보리밭 옆에 세차장이 있었다. 젠틀맨인 사장은 올 데 갈 데 없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세차장 구석에 있는 공터를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나는 공터에 차 한두 대가 들어설 작업장을 만들고 나머지 손바닥만 한 땅에는 다섯 식구가 거처할 천막을 치고 이사했다. 본래 이사란 집을 사거나 세집이나 셋방을 얻어 가기 마련인데 천막마저 빌릴 정도이니 식구들이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을 꾸밀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벽돌 두 개 높이로 빗물 배수구를 만들어 외부와 내부를 경계로 삼았다. 비 오는 날에는 방안에 똘이 생겼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그나마 장마철에 소나기가 와서 자다가 천막이 무너지는 바람에 물벼락을 맞아야 했다. 더 쓰고 싶지 않다. 6년 만에 어머니를 모신 셈이었다.

1974. 7. 1

  굶어 죽지 말라는지 며칠 동안 계속 밤 12시 통금시간까지 야간작업을 계속했다. 10만 원을 저축했다. 1개월 동안 쓰고 남은 돈이다. 나는 세차장 사장에게 사례를 했지만 끝내 사양했다. 고마운 분이었다. 나는 금 한 돈짜리 반지를 만들어 사장 딸에게 선물했다.

  소설을 써보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걱정이다.
  놀라 잠을 깨니 벌써 34살 중년이었다.

1974. 8. 13

  방 하나를 35000원에 얻어 밤에 몰래 이사했다. 치매노인이 있으면 야단이었다. 밤이 되자 또 시부렁거린다. 밤새 신령님, 하나님, 부처님을 찾는다. 내일 품을 팔러 나가야 하니 잠을 자얄 텐데, 큰일이다. 잠을 깨놓으니 어쩌나! 고아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려서부터 내 인생은 어머니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

  공짜로 계속 사용하기가 미안해서 세차장 사장에게 월세 격으로 5000원씩 주기로 했다.

1974. 8. 15

  광복절 기념행사장(국립극장)에서 대통령 축사 중 재일교포 문세광이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쏜 총에 맞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여중새 1명이 유탄에 절명했다.

1974. 10. 15

  태호 운동회날이다.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출전하는데 태호가 2학년 대표로 나간다. 아내와 유라를 데리고 일찍 학교에 갔다.

1974. 10. 28

  발을 뻗기도 힘든 좁은 방에서 밤새 천신을 찾는 귀신소리. 히히힛! 히히힛!
  "요놈의 입!" 하고 이불을 덮어씌우면 고함을 치는 바람에 온 식구가 잠을 깬다. 안집이 미안해서 이불을 두겹으로 덮어버린다. 이불 속에서도 계속 시부렁거린다. 나는 늙기 전에 죽어버릴 것이다. 통곡하고 싶다.

1974. 12. 9

  겨울날 안방에서 어머니가 중대한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24세 때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나서였다. 콩밭을 매는데 남사당패 남녀가 호사한 차림으로 춤을 추며 지나갔다. 마음이 동한 아버지는 호미를 팽개치고 무작정 남사당패를 따라나섰다. 강경에 도착하여 숙소에 들자 아버지는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아버지가 마음에 든 단장은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다며 칭찬해주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두 작은아버지가 5일 동안 수소문해서 강경 숙소를 찾아갔지만 아버지는 광대패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작은아버지들은 아버지를 황산나루까지 끌고 갔지만 끝내 고집을 부리자 “그럼 우리 둘은 강에 빠져죽을 테니 잘 살아보세요.” 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제야 겨우 아버지는 도생들 뒤를 따랐다.
  “5일 만에 집에 돌아온 거여.”
  어머니는 어두운 눈을 끔벅거리며 헤헤 웃었다. 
  “가슴 아픈 추억인데 웃어요? 새댁이 소박맞은 셈인데?”
  “그렁게 늬 아버지가 나헌티 평생 꼼짝 못헌 거여. 히히히히.....”
  신이 난 모양인지 어머니는 또 옛 추억담을 꺼냈다.
  “일제 때 니(4) 살 된 너를 데리구 서울 누나네 집을 갔을 땐디, 늬 죽은 형과 백화점을 구경하다가 늬를 잃어버린 거여. 고생고생하다 찾고 봉게 어느 예편네가 늬를 변소에 데리고 가 있더란 말여. 남사당패에 팔아먹을려구 늬를 훔쳤던 거여.”
  “차라리 남사당패가 됐더라면 내 팔자가 활짝 폈을 텐데.”
  “어매, 얘 말허는 것 좀 봐. 뭐여? 팔자가 펴? 에미 애비를 영영 못 만났을 틴디?”
  “그러니까 좋지. 광대 자식이 되면 얼마나 좋아. 일류 배우가 됐을 거라구.”
  “유라 에미 같은 여자를 못 만났을 틴디?”
  아내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암튼 아버지의 유전자가 내 광기에도 작용한 모양이다. 사실 우리 집의 비참한 가난도 아버지의 역마살 탓일지 모른다.

1975. 1. 6

  손바닥만한 방에 중고 캐비넷, TV, 화장대, 아랫목부터 어머니, 태호, 나, 아내, 유라가 차례로 누었다. 답답해서 잠을 깨곤 한다.
  유라가 자꾸 입을 빤다. 5식구 중에 어머니는 충청도 말씨, 나와 유라는 경상도 말씨, 아내와 태호는 강원도 말씨를 쓴다.

1975. 1. 21

  지난 8일 서울 봉천동에 사는 고향친구 부부가 대구로 찾아와 서울로 이사하면 굶어죽겠느냐고 설득하는 바람에 오늘 차를 대절하여 서울로 이사했다. 10만 원 보증금에 월세 만원. 방 두 칸을 얻었는데, 대포장사를 시작할 작정이다. 경험이 없어 장사가 될지 걱정이다. 상호는 <청포집>으로 정하고 색씨를 1명 두기로 했다.

1975. 2. 12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80%, 유신헌법 찬성률은  73.1%.

1975. 3. 4

  부산중 동창이며 성창목재 과장인 성국이 자고 떠나며 내게 몇 푼을 쥐어주었다. 그는 서울대 상대를 나왔는데 아내는 스튜어디스다. 그는 내 걱정이 태산이다.
  종암동에 사는 박 선생을 찾아갔다. 부산에서 올라와 홍익대 학장이 된 그 역시 내 은인이다. 과천시를 설계한 도시계획위원인 그는 내게 장사 요령을 알려주었다. 자기가 유럽에서 먹어본 빵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며 기술을 익히라고 당부했다.

  월말 계산하니 전기 수도 식대 생활비 제하고 순이익금이 15000원이다. 좋은 장사다. 하지만 술 정사는 그만두기로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