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48회)

충남시대 2024. 11. 12. 14:54

10·26사태와 5.18민주화운동


1878. 3. 9

  겨우 살만 하니까 떠나다니. 어디서 울고 있느냐. 어서 돌아오라!
  수니는 만날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단다. 미치겠다. 수니가 손님이 밀리는 업소를 팽개치고 나간 것도 그 오해 때문이다. 의정부 생질녀가 외숙모 펀지를 대신 붙여주었다. 편지 첫마디부터가 내 가슴을 울렸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저는 지금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은 환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속옷은 건넌방에 있으니 찾아 입으세요.....

  정말 미치겠다. 왜 이리 내 마음을 몰라줄까. 하기야 그 깊은 애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내가 잘못이다. 나는 아내에게 보고 싶은 마음을 원고지 열 장 분량이나 썼다. 무엇보다 유라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 유라 체취를 온 집안에 풍기려고 그놈 옷은 옷걸이에 걸고, 책상과 책은 그대로 두고, 가방은 거실 책장 앞에 놓았다.

1978. 7. 23

  내가 용산고 11회 동창 중에 각 분야의 대표적인 동기생 11명을 골라 용진회(龍進會)를 만들었다. MBC 아나운서 실장 김용, 서울대 교수 이무근, 동창회장 임흥빈, 외과의사 안흥인, 위생복제조업체 사장 최준웅, 보안사령부 정치담당 유휘문, 역곡 땅부자(훗날 시의회 의장) 윤건웅 등인데 내가 총무를 맡아 모든 모임과 행사를 주선했다.

1978. 10. 20

  셋째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 고향에 다녀왔다. 조카인 나는 슬피 우는데 상주인 사촌들은 부의금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1978. 12. 16

  미국(카터 대통령)과 중공(中共: 중화인민공화국. 등샤오핑 주석)의 수교를 발표했다. 대신 미국은 중공의 요구대로 자유중국(대만)과의 수교를 단절했다.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는 수교도 단절하는 냉혹한 현실에 자유중국은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은 월남(越南)을 버렸고 이제 대만을 버렸다. 지난번 닉슨 대통령의 중공 방문(핑퐁외교)으로 교류의 길을 튼 후 수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1979. 1. 1

  미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를 맺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임을 승인했다. 자유중국과(대만)는 국교를 단절하고 공동방위조약마저 중지시켰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 교류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대만에서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화난 군중이 미국대사관에 돌을 던졌다. 미국에서는 5일 후에 특사를 파견하여 대만을 위로해주었다. 45년이 지난 지금은 대만과의 무력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중국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미국은 대만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

1979. 6. 6

  김용 아나운서 집에서 용진회 회식이 열렸다. 그는 매일 TV에서 뉴스 앵커로 바쁘지만 내 요구를 받아들여 회식을 열어주었다.
 
  서울대 이 교수 부인이 유라 옷을 사 와 회식 후에 아내에게 전해주었다.

1979. 10. 26

  박정희 대통령이 안전가옥(安家) 모임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권총에 시해되었다. 통칭 ‘10.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밤 7시 40분경 종로 궁정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안가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 앞에서 경호실장 차지철과 다투다가 실장을 쏘고 동시에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 김재규의 경호원들은 나머지 대통령 경호원 4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1979. 11. 3

  박 대통령 장례식이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국립묘지에 육영수 여사와 나란히 안장되었다. 커다란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독재자였지만 그가 이룩한 한국의 빈곤퇴치는 경제성장의 커다란 기폭제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1980. 4. 27

  열 살 된 유라 궁둥이를 만졌더니 왜 다 컸는데 만지냐는 거다. 아빠 궁둥이를 닮은 것이 아빠 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가락도 아빠 딸이라 닮았다고 했더니 “그럼 내 다리도 아빠처럼 털 나겠네.” 한다.

1980. 5. 9

  경우회 고문, 회장단, 분회장이 화엄사에 다녀왔다. 나는 관악구 회장으로 참여했다. 오는 길에 남원 광한루에도 거쳤다. 제일 젊은 내가 분위기를 살리며 유흥을 리드했다. 큰 역할이었다.

1980. 5. 23

  아내가 독산동 우시장으로 고기를 사러 갔다가 버스에서 금목걸이 (4돈 중 20만 원)를 날치기당했다고 한다. 대여섯 일당 중 한 놈이 이마를 탁 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그 날치기 사건보다 광주사태에 대한 소문에 더 흥분했다. 우리 동네는 5월 18일에 시작된 사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매스컴이 보도 통제를 받고 있어 닷새가 지난 후에야 독산동 고기 도매시장에 갔다가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많은 광주 시민이 데모하다 계엄군이 쏜 총에 사망했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고 소문에 의하면 전두환의 계엄군이 민주운동에 앞장선 데모대에 총을 마구 쏴댔다는 거야. 더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어.”
  나는 즉시 동네 친목계원인 금은방 사장과 양복점 사장을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들 역시 아무 5.18사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은 월말이 지나서야 조금씩 퍼져나갔다.

1980. 8. 26

  새벽 1시. 유방 수술한 아내가 고이 잠들어 있다. 원자력병원에서 처음 진단하고 그 후 고려대병원에서 재차 확인하기 전 나는 두려움에 쌓여 지내야 했다. 처음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이 될까 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엾은 아내! 고생고생하다 병만 얻었으니!
  천만다행으로 암은 아니란다. 오 하나님!

1980. 10. 20

  서대문 로터리 뒷골목에 작은 식당을 차렸다. 문화방송 아나운서들이 여러 명씩 단골로 찾아왔다. 고마웠다. 독산동 집에서 출근하던 순애를 그 식당 다락방에 재웠다.

1981. 7. 1

  오늘부터 대구와 인천이 부산에 이어 직할시가 되었다.
  소설 창작을 위해서는 어휘 습득이 필수적이다.

1981. 8. 25

  신림5동에 있는 초라한 기와집을 전세금을 안고 매입했다. 대지가 29평이지만 상업지역인데다 전철이 개통될 예정이라 전망이 좋았다. 그런데 전철이 지하로 안 뻗고 지상으로 설계되어 큰일이다.
  공교롭게도 충무로4가파출소에 근무할 당시 어린 태호를 돌봐주던 사환이 장가들어 우리 집 외딴방에 세 얻어왔다.

1981. 10. 8

  새벽 2시에 잠이 깨져 거실 소파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런데 내 생애에서 가장 깨끗한 환경에 살고 있는 지금 왠지 살고 싶지 않다. 너무 고생해서 지친 탓일까?

1981. 11. 24

  드디어 태호 생모가 나타났다. 10년 만이다. 그녀도 시집가 딸애를 낳았다고 한다. 주제꼴이 후줄근해 마음이 아팠다. 남편이 걸핏하면 술에 취해 폭행한다니 더욱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 독한 여자가 호랭교(일련종정. 미등록 사교)를 믿어 사람이 달라졌다. 그때 고소해서 사표를 내게 한 것도 설마 경찰 그만두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시종 점잖게 대해주며 태호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소주를 마시며 아내의 손을 잡고 사죄의 뜻도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변화시킨 그 사이비 종교가 어느 종교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랭교는 내가 정보형사 시절 내사內査 지시까지 내려왔던 말썽 많은 종교였지만 그처럼 악독한 여자를 감화시킨 그 종교가 고마웠다.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죽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음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꾸미기 때문이다. “죽은 너를 사랑해 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제 새로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