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밥집 주인이 주례를 서다
1975. 5. 13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 반대, 부정, 비방행위를 금지시켰다.
1975. 7. 26
서울 봉천1동(당곡)에서 이잣돈을 얻고 전당포에 시계를 잡혀 과일과 야채장사를 시작했다. 용산시장에서 무 배추와 과일을 받아와 팔았는데 일반시장 상인들은 도매가로 떼다 팔지만 나는 몇 포기씩만 떼다 파니 시장보다 비싸거니와 상품 질이 떨어져 팔리지 않았다. 가끔 아는 사람들이 동정으로 팔아줄 뿐이었다.
야채장사를 접고 건축현장에서 일용직으로 품을 팔았다. 하지만 판넬을 나르기에는 힘이 부쳐 위험했다. 등에 판넬을 메고 2층 3층에 오르다 넘어지면 즉사할 판이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해봐요. 원래 약체라 공사판 일은 포기하소.”
오야지(감독자)의 말이었다.
1975. 9. 1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봉신시장에서 아귀탕집을 차렸다. 나는 아귀를 사러 인천에까지 다녀야 했다.
용산시장에서 싸구려 보세품을 사 입고 좋아하는 아내와 지식들이 가엾다.
1975. 12. 24
태호는 방학숙제하고 유라는 오빠 옆에서 그림을 그린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갯스비』를 읽었다. 소설도 명작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가 떠들썩한 작품으로 부상했다.
1976. 1. 26
안양에 있는 1급정비공장에서 사장이 찾아와 나를 도장부 책임자로 초청했다. 어떻게 대구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고맙지만 기술이 부족한데 반장 직책은 무립니다. 빠대 솜씨도 엉망인데 직원들이 제 말을 듣겠어요?”
“내가 사장인데 그런 걱정은 마세요. 성실과 책임감이 더 중하죠. 대구 소문은 들었습니다. 대구에서 빠대칠 잘하고 후끼(도장) 잘해서 손님을 끌었습니까? 직원들은 내가 설득할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이튿날부터 스스끼복(상하가 붙은 하얀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다. 육군 스타 출신인 사장은 내 성실성에 감탄하여 월급 55000원과 약조금 조로 60000원을 계산해주었다. 기술은 숙련공에 비해 뒤지지만 손님에게 친절하여 단골이 많아졌다. 회사 간부들도 나를 잡아두려고 야단이었다.
“요즘은 차량 검사가 엄격해서 기한 내로 출고가 안 되면 큰일입니다. 그런데도 퇴근 시간만 되면 모두 몸 씻고 옷을 갈아입어요. 마무리 안 된 검사차를 그냥 놔둔 채 말입니다. 미칠 지경이죠.”
사실이었다. 내일 검사장으로 나가야 할 버스 내부 칠을 끝내지 않은 채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적이 있었다. 나 혼자 밤늦게까지 칠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에나멜 칠이어서 건조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장도 퇴근하지 않고 테이프 작업을 도와주고 내 야식을 준비해주었다. 겨우 통금시간 전에 도장을 끝냈지만 마스크를 착용했어도 칠이 코에 눌어붙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내다가 사표를 냈다. 경찰직을 순순히 버렸듯 내 생을 정비업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사장이 집에 찾아와 사정했다.
“부장 자리를 맡아주시오. 아니면 부사장 자리도 좋소.”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내와 함께할 개인 직종을 찾아야 합니다. 자리가 잡히는 대로 저는 혼자 할 일이 있거든요. 어떤 대가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제 나름의 운명적인 의무랄까요. 정말 죄송하고 괴롭습니다. 사장님 같은 분과 오래오래 함께 지내고 싶지만.....”
나는 사장과 헤어지는 게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창작에 대한 내 운명성은 어느 행운과도 타협할 수 없었다.
1976. 5. 12
아내는 동아제약 오란씨 공장 신축 함바로 들어갔다. 인부들 성깔이 더럽지만 참아야 했다. 노인과 애들도 현장 판잣집에 재웠다. 태호는 석수동에서 창경국교까지 다녀야 했고, 영순이가 외숙모 일을 도와주었다.
식대비(간조)가 나오지 않아 아내가 회사측과 싸우다 기절하다. 내가 쫓아가 고함을 쳐 돈을 찾아왔다. 총 재산 80만 원이 모아졌다.
1976. 7. 2
미국에서 반전시위가 극성을 부리던 작년 1월에 실시된 미국 제3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닉슨 대통령은 즉시 월맹 폭격을 전면 중지시켰다. 그 바람에 1975년 4월에 월맹군이 월남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는데 당시에 사이공을 탈출하려는 인파의 아비규환이 눈물겨웠다. 그 후 이듬해인 오늘 베트남이 통일되었다.
1976. 9. 18
봉천1동(당곡)에 전세 백만 원짜리 가게를 얻어 정식으로 식당을 개업했다. 상호는 <경포대>로 정했다. 아내의 음식솜씨가 미숙해서 손님들이 아내에게 가르쳐 줄 정도였지만 외모로 보아 고생할 새댁이 아니어서 손님마다 동정적이었다. 아내 역시 손님 테이블을 일일이 찾아가 연탄불에 끓고 있는 찌개를 수저로 간보며 “맛이 어떠세요?” 하고 묻곤 했다. 아내의 그런 착한 태도가 고마운지 한번 들린 손님은 거의가 단골이 되었다.
1977. 1. 8
오늘 37,600원을 올렸다. 개업 후 최고의 매상이다.
금성 냉장고를 190,000원에 사들였다.
남부세무서에 유흥음식세 5800원을 냈다.
1977. 3. 7
오늘이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식 날이다. 유라가 당곡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사진을 찍어주었다.
1977. 3. 26
새로 뚫린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한 많은 대관령을 넘을 때 눈물이 흘렀다. 진리에서 예비군 김용근을 만나 술을 마셨다. 광산김 씨인 그가 공동묘지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돌봐줘 사의를 표했다. 예비군 훈련 중에도 성깔이 사납던 청년이었다. 광산김 씨는 반골체질? 그래서 예능체질인지 모르겠다.
1975. 6. 5
태호 생모의 오빠뻘 되는 기업체에서 원호성금 1천 5백만 원 낸 것이 한국일보에 보도되었다. 큰 액수였다. 사무실은 광화문로에 있었다. 나는 그 회사 중역으로 오라는 유혹을 끝내 거절해왔다. 그런 악마와 사느니 지옥을 택하고 싶었다.
265,000원에 백색전화를 놓았다. 양옥집 1채 가격이 160만 원이었다.
1977. 10. 28
장인이 군트럭에 치이고도 억울하게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내가 양구에 있는 부대로 쫓아가 헌병대에서 합의하고 장교가 집에 찾아와 사과하게 만들었다. 처가 동네에서 똑똑한 사위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딸을 훔쳐간 서울 사기꾼 놈이 아니라 처갓집 보배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
1978. 1. 12
14살 된 태호가 처음 돈을 벌어왔다. 활터에서 노인들이 쏜 활촉을 주어오는데 한 달에 12,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또 신기록을 깼다. 드디어 10만 원이 넘는 매상을 올렸다. 외상값 8800원까지 보태면 108,800원인 셈이다.
1978. 2. 24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를 섰다. 평소 나를 존경해온 체육관 관장이 자기 여동생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부탁했던 것이다. 가난한 밥집 주인이 주례를 서다니. 여러 번 거절해도 관장은 막무가냈다.
내가 동네 대표적인 상인들을 모아 청운회를 조직하고 회칙도 만들었다.
5년 전에 설립된 마을금고에 기금 2백만 원 공동 적립했다.
1978. 5. 24
동네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생일잔치를 벌였다. 청운회와 관악친목회에서 관록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지성이 높으신 분이 왜 숨어사냐며 내 밑바닥생활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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