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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회)

인민군 복장으로 애들과 병정놀이하다 파도소리가 바위에 부딪쳐 생긴 환청이겠지만 그 음침한 소리에 홀린 어부들은 근처에 집짓기를 꺼려했다. 충청도에서 이곳 동해안까지 흘러들어온 외지인 둘이 상여집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산 적은 있지만 무장공비사건 이듬해에 그나마 불타고 말았다. 소문에는 귀신이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고 충청도 사람 둘이 고향으로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서 밤늦게야 떠날 테니 강릉에 가서 호텔방을 예약해두게.” 박 기사를 차에 태워 보낸 동호는 곧장 당산 쪽으로 걸어갔다. 산자락을 따라 모래톱이 깔려있고 모래톱 막바지 분지에 빨간 함석지붕이 보였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햇살도 파도에 부서져 포말처럼 날렸다. 함석집 시멘트 벽면에는 광어, 우래기, 한..

연재소설 2023.03.05

제25회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 남문우 변호사 자전(自傳) 이야기

사법시험 합격Ⅲ 나는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 하늘을 찌를 것 같이 기쁘고 그 기쁨을 나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나 이상으로 사법시험 합격을 고대하던 아내에게 한 시간이라도 빨리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합격자 명단을 보기 전에는 나 스스로 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에 아내에게 말했다가 뒤집힐 경우 그 실망감을 어찌 감당하랴 싶어서 정식으로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나 혼자 가슴을 졸이면서 합격자 발표일까지 이삼일을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줄 미쳐 몰랐다. 드디어 발표날인 1964년 8월 20일 오후, 같은 과 직원 이영훈, 강정훈 등..

휴먼인사이드 2023.02.22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회)

미친소녀 2 동호가 서초경찰서에서 연주의 수첩을 인수한 것은 회사 출근 무렵이었다. 박 기사가 집 앞에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오르려는 순간 카폰이 울렸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행려병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싶으니 형사과로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동호는 회사 출근을 미루고 곧장 경찰서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서는 바로 집 근처에 있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담당 형사는 동호에게 예의를 차리고 나서 얄팍한 서류철을 내보이며 겉장에 부착된 여자의 얼굴 사진을 확인시켰다. 분명 연주였다. 갸름한 턱과 오똑한 코와 곱다란 눈매는 옛날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동호는 형사에게 그녀의 인적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알려주고 나서 처녀시절에 실성기가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형사는 사진 속 여자의 신원이 확인되자 그제..

연재소설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