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19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회)

K시 시장 딸이 찾아오다 “뭐라고요? 민주가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꼽추가 된다고요? 그럼 민주한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신세 망친다고요.” 핸드폰을 들고 그런 식으로 공갈을 치면 민주는 꼼짝없이 내 애인이 되고 만다, 신나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그 상상은 부산중학교에 다니고부터 이루어질 기미가 보였다.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도 산에서 나무만 하던 내가 부산에서 제일 명문인 부산중학교 학생이 되었으니 민주로서는 넋이 나갈 수밖에. 이제는 민주가 애간장을 녹일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중학 졸업반이 되자 가슴이 더 풍만해지고 눈꼬리로 비나리칠 줄 아는, 기막힌 여학생으로 성장했지만 내 급상승한 권위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민주는 고교 진학이 불가능한 처지였다...

연재소설 2023.11.14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회)

실컷 울어보는 게 소원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생을 사셨다죠? 인터뷰할 때마다 신문기자나 아나운서의 첫마디는 대개 그러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이 아무리 기구해도 오이디푸스의 신탁(神託)만큼 끔찍한 팔자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아야 하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비하면 내 운명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삼년 전이었다. 67년간 써온 일기를 정리하다가 고교시절에 쓴 일기 한토막이 소름을 끼치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면 지금 당장 한강에 투신하겠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기였다. 겨우 고등학교 1학년생이 그따위 생각을 하다니! 그럼 나에게도 이미 가혹한 신탁이 내려진 게 아닐까? 행복을 부정한 그 가치전복(價値顚覆)이 내 신탁이란 말..

연재소설 2023.11.07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5회)

죄와 야비 “내가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동호는 침착하게 말을 엮어나갔다. “방금 배형이 한 말은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배형의 속맘은 절대 자수할 의향이 아니었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배형 입장에서는 자수논리보다 체포논리가 합당했다는 말이죠. 체포로 우겨야 이북 가족이 무사할 수 있는 데다 자수는 바로 배승태란 사람의 진정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배형은 지금도 그 투쟁의지에서 뭐랄까.....” 동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송두문이 불쑥 아는 체를 했다. “투쟁으로 말한다치믄 사람 사는 게 죄 투쟁일 틴디유? 장사도 투쟁이구 농사도 잡풀이나 벌레와 투쟁허는 거구.” “그 투쟁과는 다르죠. 배형의 투쟁은 전략이나 전술처럼 살아가는 방편이 아니고.....” “얼래, 증말로 두 분이 끝을 볼 참인..

연재소설 2023.10.31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4회)

적화통일이디 머갔어? “약한 모습?” “내레 기걸 죽은 목숨이라고 여겼더랬어. 한마디로 오마니마저 부정하고 싶었던 게야. 오마니가 거추장스러웠어. 오마니 꿈을 꾼 거이 창피했더랬어. 오마니를 그리워한 거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배라먹을 그리움 땜에 꿈을 꾼 거구 총을 주게 된 게야.” “.....” “깡깡 언 몸을 녹이려고 뜨순 아궁이 앞에 앉아 있으니깐 어드러켔어. 식곤증까지 겹쳐개디구 바로 졸음이 왔디. 기때 꿈 속에서 오마니가 나타나신 게야. 어린 난 감나무 토막으로 팽이를 만들고 있더랬어. 보통 땐 팽이를 낫으로 깎았더랬는데 은장도로 깎고 있었디. 은장도를 무척 갖고 싶어 안달했거든. 오마니가 깊이 간수할수록 더 갖고 싶었던 칼이었어. 장난감처럼 귀엽게 생겼디만 외경스런 느낌을 풍겼디. ..

연재소설 2023.10.24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3회)

저걸로 병정놀이를 했나? “그 후로 송씨는 한번도 못 만났나요?” “그 친구가 고향에 내려오겠다고 동네에 기별을 넣으면 나는 일찌감치 숨어버리곤 혔어유.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 친구를 대면헐 수 없었쥬. 그려서 숨군 혔는디 친구는 그때마다 돈을 몇 푼씩 맡겨놓고 떠났걸랑유.” “누구한테 맡기죠?” “동네 이장헌티유. 허지만 절대로 그 돈을 찾지 않을 참유. 이장이 여즉 챙기고는 있는디 그 돈을 내 꺼라고 생각혀본 적이 한 번도 읎구먼유.” “왜 찾아 쓰지 않았죠?” “나도 사람 구실을 혀보고 싶은거유. 죽을 날도 멀잖지만 손주녀석이 곁에 있는디 인제 쓸개 읎는 짓은 안 헐라고 작정했슈. 그놈헌티 핼애비 몫을 혀야잖유. 또 그 돈을 가져다 뭐에 쓰겄슈.” “나중에 목돈이 되믄 부락 기금으로 쓰도룩 허구 병..

연재소설 2023.10.24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2회)

3억잉게 쓰고 싶은 대로 써봐 송두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억배를 혼자 남겨둔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로 지하층까지 내려온 그는 곧장 카페로 들어가 술을 청했다. 왠지 가슴에서 슬픔이 치올랐다. 황억배에게 한 뭉치를 주고 나니 다소 마음의 빚이 덜어진 것 같기는 했다. 거짓말로 우겨서 탄 포상금 아닌가, 그 죄업을 어떻게 풀까 하고 늘 가위눌리며 살아왔는데, 그 죄업을 탕감받을 수만 있다면 건물 하나쯤 당장 요절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디 그 무장공비는 지금 워디서 워떻게 지내고 있는 거여? 송두문은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몸이 나른했다. 몸이 풀어지자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굶은 채 멀건 보리죽을 끓여 남편의 배를 채워주던 아내. 그 눈물겨운 아내가 재산..

연재소설 2023.10.24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1회)

박 기사가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에 먼저 오른 동호는 황억배를 뒷좌석에 앉혔다. 차가 서서히 시멘트 길을 미끄러지자 황억배가 또 너스레를 떨었다. “이건 구경도 못혀본 찬디, 영락읎이 구름을 탄 기분이네유.” “흔한 찬데요 뭐. 에쿠스라고 국산 찹니다. 손닙 접대 때문에 불가피 큰 차를 쓸 수밖에 없지만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요.” “으이구 겸손허시긴. 남들은 그럴 팔자가 못돼서 한인디 사장님처럼 큰일 허시는 양반이야 의당 타고도 남쥬. 아 글씨 여기 같은 촌에도 외제차가 뻔질난당게유. 밴스니 삐엠이니 그런 것도 오구유.” 그때 키가 땅딸막하고 몸집이 통통한 열 두세 살 됨직한 사내애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런 쥐새끼 같은 놈이 시방 워디서 오는 거여?” 황억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중얼..

연재소설 2023.09.26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0회)

요즘도 거지애가 있다? 동호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디를 싸질러 다니는데?” “동네방네쥬. 윗뜸도 가고 아랫뜸도 가구유.” “거기서 뭘 해주고 뭘 얻어먹지?” “해주는 일은 암것도 없구 밥만 축내는디 동네서 모두 혀를 내둘러유. 누가 뭐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고 제 멋대로 말썽만 피운다구유. 그애 땜에 정말 속상해죽겠어유.” “왜? 무슨 일이 있었니?” “오늘도 방금 우리집서 점심을 얻어먹고 나갔는디 글쎄 내 러브러브 인형이 없어졌어유. 걔가 훔쳐간 게 틀림없구먼유.” “병구 아버지는 뭘 하시냐?” “아버지가 없어유.” “엄마는?” “엄마도 없어유. 어디서 주어 온 애란디, 그래서 싸가지가 없나봐유.” “병구 할아버지는 지금 뭘 하시는데?” “잘 몰라유.” “고맙다. 병구가 네 인형을 가져갔다면 돌려주..

연재소설 2023.09.19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9회)

송두문과 황억배를 찾아가다 “나와 연애하겠다는 거요?” “연애는 벌써 시작했으니 이젠 약혼 단계죠.” “미치겠구먼. 이제 보니 당신 겁나는 여자군.” “저를 무시하는 거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동호는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성미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장난스런 말로 얼버무릴 여자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올가미에 채일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소.” 동호는 거짓말로 성미의 마음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성미는 그의 진지한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픈 말만 지껄였다. “그건 아무 상관없고요, 나를 다방 여자로 만들지 않으려면 당장 거처를 마련해주세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있어? 그런 말이 입에서 뱅뱅 돌았다. 혹시 논다니가 아닐까 하는 의..

연재소설 2023.09.13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8회)

왜 일가친척이 없는 거요? 옛날처럼 동호씨란 호칭도 쓰지 않았다. 응당 오빠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테지만 그 호칭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내한테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줘. 나한테는 오빠라고 부르고.” 동호가 일부러 말문을 트여주자 그제야 연주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주의 그런 태도 역시 낯설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나 웃는 모습이 옛날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옛날에는 자기 행동에 어떤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질질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생기가 돌았다. 또 옛날의 행동이 기계적이었다면 지금은 몸짓과 웃음새를 자기 나름대로 꾸며보였다. “정신이 온전해졌나봐요.” 성미는 동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돌봐준 덕이야. 당신은 대단한 여자라구..

연재소설 202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