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19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2회)

가짜 사직서를 받은 징계위원회 징계위원회는 회의실에서 열렸다. 위원은 각 과의 과장이 맡았고 위원장은 부서장급인 경무과장(당시에는 경무계장. 경감)이 맡았다. 위원장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보안과장, 경비과장, 수사과장, 정보과장이 앉고 한 쪽에 입회감찰과 용하가 앉았다. 징계사유는 경찰관 품위실추와 서은지와의 통간 건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징계위원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징계받을 사람을 두둔하는 징계는 처음이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징계는 징계이니만큼 절차를 밟아야 되므로 자네도 성의껏 답변해 주기 바라네.” 회의가 열리기 전에 위원장이 분위기를 잡았다. 다른 위원들은 어서 회의를 끝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뻔한 일인데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수사과장이 싱거운 말을 던졌다. 그러자 위원장..

연재소설 2024.04.16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1회)

차마 악마를 죽이지 못하다 1966. 9. 9 바쁜 직무를 빼놓고는 덤덤한 하루였다. 우연히 헌 잡지에서 ‘종합연구 유머’를 읽었다. “유머는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서는 맛을 모른다. 부른 배가 빨리 꺼지게 하는 소화제가 유머이다.” “유머는 웃음이 당장 탁 터져 나오는 것은 좋지 않고, 씹을수록 은근히 웃음이 솟구치는 것을 제격으로 친다.” “영어를 생판 모르는 친구가 미국에 간다는 말을 듣고, 영어를 몰라 불편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나는 괜찮지만 미국 사람들이 불편하겠지.” “유머 이야기는 미국식이요 희극적인 이야기는 영국식이며 기지에 넘친 이야기는 불란서식이다.”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작가이며 유머리스트인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무덤을 보면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신시내티의 무덤에선 나무가 ..

연재소설 2024.04.08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20회)

신체의 중심은 배꼽이 아니고 음분디? 1964. 12. 6 오늘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을 국빈 방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 파견 광부들이 가장 많은 함보른 탄광회사를 방문하여 한인 광부 300여 명과 간호원 50여 명이 모인 회사 강당에서 연설하고 노고를 치하했는데 그 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부자 나라의 탄광에서 파견국민을 만난 그 감회야말로 오죽했겠는가! 내가 기동대로 발령 난 것은 박 대통령이 서독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날씨가 풀리면 시국이 더욱 시끄러워질 기미가 보이는 터라 기동대의 역할은 컸다. 내자동 기동대 운동장에서는 매일 진압훈련이 실시되었다. 기동대는 경찰의 정예부대였다. 서울경찰청 관내 어느 곳이든 상황이 터지면 우선 출동하는 부대가 기..

연재소설 2024.04.02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9회)

동경올림픽 때 북한 신금단 부녀 상봉 “아냐, 독종이 많아. 밖으로 나오는 건 문리대보다야 덜하지만 아주 질긴 놈들야. 그놈들은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 만다니까.” “그나저나 문리대에 정치외교학과만 없어도 덜 시끄러울 텐데. 대학교에 정치학과가 뭐 필요해. 육사 출신만 해도 너무 숫자가 많은데. 권력기관은 거의가.....” “자네 큰일 날 소리 하는군. 말조심해.” 홍기평은 내 팔을 끌었다. 저쪽 소방대원 대기실 다다미 바닥에는 노름판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개평 뜯을 게 아니라 우리도 한판 붙자고.” 내 느닷없는 말에 홍기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 같은 철학자도 노름할 줄 아나?” “조금 해봤지.” 나는 애나와의 갈등을 잊기 위해 한두 번 화투에 손댄 적이 있었다. 화투에 손대는 시간에는 ..

연재소설 2024.04.02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8회)

6.3비상계엄 선포 풍차에 대한 진압부대원들의 기대는 컸다. 주먹만 한 사과탄 두어 개씩을 방어무기로 꿰차고 다니던 대원들에게 그 풍차는 원자폭탄이나 진배없었다. 지휘관들도 뒷짐을 진 채 국가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이바지할 괴물을 우러러보았다. 시민들 역시 데모판에 처음 등장한 그 괴물을 보기 위해 세종로 네거리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드디어 풍차 앞에 최루탄을 터뜨려놓았다. 그런데 최루가스가 시청 쪽이 아닌 중앙청 쪽으로 거꾸로 날아들었다. 데모대를 쫓아야 할 가스가 진압부대를 덮친 것이다. 바람의 역풍 탓이었다. 내가 속한 진압부대원들도 콜록콜록 재채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민들이 웃었다. 이제 풍차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학생들이 도로를 메워가고 있었다. 남녀가 혼합된 서울대 음대생들이..

연재소설 2024.03.19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7회)

이래저래 나 환장한 년이다! “이제 나와 상종 않겠다 이거지?” 그녀는 계속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나는 방어자세를 취하지도 못한 채 멍청히 당하기만 했다. 대신 위병소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그녀 곁으로 다가서며 타일렀다. “아주머니 고정하세요. 여긴 신성한 교육기관입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죠?” “경찰관 교육기관 이랬잖소.” “누가 그걸 몰라 물었어요? 이런 사기꾼 놈을 합격시켜도 되냐 그 말이에요.” “참 싱거우시긴. 신원조회해서 뽑았는데 저 사람이 왜 사기꾼입니까?” “경찰도 썩었구먼. 이런 형편없는 걸 뽑았으니 썩을 대로 썩었어.” “뭐요? 썩어? 저기 기념탑에 새겨진 교훈을 읽어봐요. 지성, 용기, 성실.” “저따위 교훈이 뭔 소용이죠? 말짱 가짜로 써 놓은 건데.” “이 양반아 말조심해!..

연재소설 2024.03.12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6회)

경찰전문학교 교훈은 지식, 용기, 성실 1963. 3. 17 매일 이력서를 써들고 이곳저곳 뒤져보지만 일할 곳이 없다. 약품, 화장품, 이름 모르는 물건들을 들고 쏴다녔지만 한 개도 팔리지 않았다. 팔릴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봐야지. 1년 반을 먼저 제대했으니, 살 방법이 생기겠지. 헌무의 양복을 빌려 입고 남포동에 있는 천향사를 찾아갔다. 금성(훗날 LG) 라디오 외판원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보증금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차비도 없는데 보증금이라니. 나는 한번 믿어달라고 사정했다. “물론 이 세상 누구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만 속는 셈 치고 절 믿어주십시오. 제 능력과 성실을 다해 팔아보겠습니다.” 사장은 내 얼굴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연재소설 2024.03.05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5회)

자네는 귀신인가 사람인가? 1962. 6. 21 극장에서 를 관람했다. 1962년은 의 해로 회자될 만큼 70mm 대형영화다. 한국 흥행은 충무로 대한극장에서만 상영이 가능하다. 일본에서도 대단한 흥행이라고 한다. 영화 모든 분야의 상을 독차지한 영화다. 원작자는 법률가, 정치가, 군인인 루 웰레스 장군이다. 다음은 영화의 감동 어린 장면을 간추린 표현들이다. “증오는 널 살릴 수 있다. 증오는 힘을 주니까.” 노예선에서 로마 집정관이 벤허에게 한 말. “그 누군가가 내게 물을 주었다.” 벤허가 노예로 끌려가며 열사(熱死) 직전에 예수님이 물을 주는 장면. “나는 너무 늙도록 살았다.” 어느 현자가 예수의 십자가형을 보며 한 말. 그리고 문둥병 계곡에서 느껴지는 그 처절한 비극에서 무엇을 캐낼 수 있을까..

연재소설 2024.02.27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4회)

10환을 1원으로 화폐개혁 “결국 폐병으로 죽었구나. 참 가여운 친구야. 네 맘이 괴롭겠다. 네 허무의 시원은 혜연의 죽음일지 몰라. 너를 진정으로 사랑했잖니.” “내 허무는 그런 인간적인 삶으로 해결될 허무가 아냐. 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날 무시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암튼 넌 이상한 존재야.” “그나저나 어찌된 거야?” “벌써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하지만 너와 만나기가 쉽지 않았지. 그러던 차에 우연히 너와 성지순례단에 끼게 된 거야. 그때 도도한 네 모습에 반한 거구.” “이런이런, 참 기막힌 인연이구나. 티브이에서 본 그 동양적인 미모에 지성미 넘치는 진가영이 민주라는 건 상상도 못했어. 성형수술했니?” “아니.” “그런데 어찌 네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거야?” “얘좀 ..

연재소설 2024.02.20

연재소설[인기작가의 한국현대사 일기] 잔아일기 (제13회)

일등병이 참모총장실에 잠입하다 그처럼 부대장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나는 의가사제대를 내비칠 수 없었다. 공군은 지원병이라 의가사제대가 해당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최고사령관인 참모총장의 공감이 절실했다. 초가집도 없어 뿔뿔이 헤어진 노부모에 대한 연민과 그런 부모를 걱정하는 자식의 효심을 공감하지 못하고는 의가사제대는 불가능했다. 나는 부모 걱정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외아들인 탓에 부모를 의탁할 곳도 없었다. 누나네 집에 의탁한 어머니 때문에 누나의 시집살이가 걱정이다. 1961. 12. 19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김용술 소령이 번역한『태풍예보』책을 며칠간 코피를 쏟으며 정리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권두언에 “一兵 金容滿에게 감사한다”고 적혀 있다. 펄벅의『대지』를 읽다. 늘 밤늦게까지 독서하는 나를 보..

연재소설 2024.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