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22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9회)

내레 남조선엔 가족이 없수다레 봄볕이 따스했다. 눈이 녹아 질퍽하던 경찰서 마당도 땅이 보송보송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공판을 앞두고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마당으로 나온 동호는 무심코 양지녘에 서서 압송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마 검사실로 검취를 받으러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간수 서너 명이 오륙 명의 죄수를 굴비 두름처럼 포승으로 엮어 압송하는 중인데 그 중에서 늙수그레한 죄수 하나가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직원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수갑이 너무 죄어져 피가 안 통한다고 엄살이더니 이젠 오줌타령이야? 암 소리말고 그냥 참아요.” 검찰청은 가까운 이웃인 데다 모두 함께 포승을 질렀으니 한 사람을 빼기가 힘들다며 참으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영감은 막무가냈다. “그럼 바지다 싸..

연재소설 2023.04.11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8회)

치부와 한은 천양지차여 이놈아 “그노므 객살이 꼈응게 바다구경 허자구 예꺼정 왔지 워디 함부로 올 딘감유. 서울보담 몇 배나 더 먼디유. 여기 오는디 워뜨게 왔능가 아세유? 기차를 타고 서울꺼정 와설랑 거기서 또 기차를 타고 밤새 달리구두 이튿날 한낮이 돼서야 강릉에 당도혔어유. 그러구두 또 뻐스를 타구설랑 한 시간여를 덜커덩덜커덩 달리고서야 사천이란 디를 왔는디, 거기서 또 시오리 길을 걸응게 그제서야 게우 바다가 뵈더라구유. 하여튼 강릉이란 디가 멀기는 육시럴허게 멀드먼유.” “충청도에도 바다가 있잖아요?” “물론 바다가 있쥬. 허지만 갯구뎅이가 씨커먼디 워디 바다 맛이 나야쥬.” “갯구뎅이라뇨?” “갯뻘 말유, 갯뻘.” “갯벌은 그 나름의 정취와 향기를 지녔잖아요?” “해금내를 향기라구요?” “해감..

연재소설 2023.04.04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7회)

권총 빼준 거이 이상하외다 동호는 공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몸에 포승을 질렀다. 그리고 호송 직원과 함께 지프에 태우면서 얼른 등짝을 훔쳐보았다. 목덜미가 아닌 등짝에 붉은 작대기 자국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한 줄뿐이라니..... 타박상을 보는 순간 동호는 이번 일이 단순한 공비 압송에 그칠 업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비는 강릉까지 달려오는 동안 묻는 말에도 입을 다문 채 살기찬 눈으로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릉에 도착하여 유치장에 수감되고서야 공비는 몸에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데 밥도 잘 먹고 담배도 곱게 받아 피웠다. 목욕을 시켜주고 새 이부자리로 잠자리를 돌봐주자 그제야 숨겨온 자기의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이튿날 대충 정황조사를 하는데도 순순히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밥을 훔쳐..

연재소설 2023.03.28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6회)

두 분이 동시에 작대기로 쳤습니까? “저걸로 잡았습니까?” “예에.” “용기가 대단하십니다.” 동호는 보호실 쪽으로 걸어가며 건성으로 말했다. 직원 하나가 문 앞에 지키고 서 있는 침침한 보호실 구석에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텁수룩한 사내의 눈이 부엉이의 그것처럼 괴물스러워 보였다. 무장공비! 동호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인간이랄 수가 없었다. 수세미 같은 머리털과 수염, 경계하는 눈초리와 표독스런 이빨, 영락없는 야수였다. 공비의 모습을 대충 살펴본 동호는 다시 근무석 쪽으로 나와 공비가 소지했던 권총과 단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부락민에게 의자를 내주어 책상 앞에 앉히고 백지와 볼펜을 챙겨놓았다. 간단한 진술부터 받아둘 참이었다. 먼저 키가 크고 똘..

연재소설 2023.03.21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5회)

체포논리와 자수논리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 큰 집을 택하지 않고 그 주먹만한 움막을 택할 게 뭐람?” “큰 집은 식구가 많구 동네 복판에 있잖갔어. 길코 외딴 움막인데 걸릴 게 머갔어. 만약 들켜두 몇 놈쯤이야 단칼에 벨 수 있으니께니.” “큰 집에 가야 먹을 게 있지 가난한 움막에 뭐가 있었겠나.” “기래도 찬밥이 있었잖나. 내 판단이 옳았던 거디.” “내 말은 우연을 말하는 게 아니고 전술적인 측면을 따지는 거라구.” “전술? 하하핫. 기막힌 말이군 기래. 기러티만서두 육감이 더 쓸모 있는 경우가 많아. 긴데 내가 여게 사는 걸 어케 알았디?” “진리포구는 자네보다 더 추억 어린 곳이지. 이 지역에서 근무도 했고, 부모님 산소도 계시고.” “기럼 고향이 여겐?” “아냐. 하지만 고향이나 마찬가..

연재소설 2023.03.14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4회)

강 형사? 기러니께니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바로 마당이었다. 잠시 마당 복판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 동호는 조심조심 창고방으로 다가갔다. 출입문 앞에는 헌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공손한 목소리로 주인을 찾자 안에서 “뉘시오?” 하는 대답이 새어나왔다. 배승태 씨를 뵈러 왔다고 받자 두세 차례 기침소리가 들리고 금방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이 잽싸게 동호의 몸을 훑었다. 분명 배승태였다. “나 모르겠소?” 동호가 턱을 내밀자 문턱으로 다가온 배승태가 얼굴을 살폈다. 눈을 연방 끔벅대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인지를 알면 초점이 잡힐 텐데 안타까웠다. 살인 전문가가 세월에 먹히다니. 죽어서도 살기를 뿜어대던 그 독종들이. “나요 나, 옛날 정보담당 ..

연재소설 2023.03.08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3회)

인민군 복장으로 애들과 병정놀이하다 파도소리가 바위에 부딪쳐 생긴 환청이겠지만 그 음침한 소리에 홀린 어부들은 근처에 집짓기를 꺼려했다. 충청도에서 이곳 동해안까지 흘러들어온 외지인 둘이 상여집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산 적은 있지만 무장공비사건 이듬해에 그나마 불타고 말았다. 소문에는 귀신이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고 충청도 사람 둘이 고향으로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었다. “여기서 밤늦게야 떠날 테니 강릉에 가서 호텔방을 예약해두게.” 박 기사를 차에 태워 보낸 동호는 곧장 당산 쪽으로 걸어갔다. 산자락을 따라 모래톱이 깔려있고 모래톱 막바지 분지에 빨간 함석지붕이 보였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햇살도 파도에 부서져 포말처럼 날렸다. 함석집 시멘트 벽면에는 광어, 우래기, 한..

연재소설 2023.03.05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회)

미친소녀 2 동호가 서초경찰서에서 연주의 수첩을 인수한 것은 회사 출근 무렵이었다. 박 기사가 집 앞에 대기시켜놓은 승용차에 오르려는 순간 카폰이 울렸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행려병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싶으니 형사과로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동호는 회사 출근을 미루고 곧장 경찰서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서는 바로 집 근처에 있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담당 형사는 동호에게 예의를 차리고 나서 얄팍한 서류철을 내보이며 겉장에 부착된 여자의 얼굴 사진을 확인시켰다. 분명 연주였다. 갸름한 턱과 오똑한 코와 곱다란 눈매는 옛날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동호는 형사에게 그녀의 인적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알려주고 나서 처녀시절에 실성기가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형사는 사진 속 여자의 신원이 확인되자 그제..

연재소설 2023.02.22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회)

미친소녀 1 이 소설은 거의가 실화이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습격사건이 터지자 그해 4월 1일 대전에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그해 10월 30일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이 터져 연말까지 토벌작전이 계속되었다. 북한 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120여 명이 유격대 활동거점을 구축하려고 울진 해안으로 침투했던 것이다. 토벌작전이 끝나자 북상 중이던 패잔병 1명이 눈보라치는 겨울밤에 밥을 훔쳐 먹으러 산속 외딴집에 숨어들었다가 생포되었는데, 그 무장공비가 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인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고부터 주인공 동호(정보형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배승태 씨가 내 손을 잡고 이상한 말을 했다. 내레 자수한 기 아니었디, 어드러케 김일성 수령님을 배신하갔어, 그런다. 무..

연재소설 2023.02.14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마지막회)

수니의 두 번째 가출 김석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이튿날 야채를 받으러 도매시장에 다녀와 보니 수니가 어린 은영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임신한 몸으로 가출했을 때는 수니만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귀여운 은영이를 데리고 사라졌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헤어지기로 작심한 듯한 수니의 메모가 자꾸 가슴을 할퀴어댔다. 새 아들을 얻었으니 이제 다복하겠네요. 축하해요. 은영이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거에요. 이제 은영이는 천덕꾸러기가 됐네요. 아무래도 일자리를 구해야 될 텐데 은영이가 부담스러워요. 당장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막막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겠죠. 양구 부모형제나 친구들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아요. 죽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에요. 다만 내가 죽을 임시에는 은영이의 거처를 알려줄 테니 알아..

연재소설 2023.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