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20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8회)

살인범 압송 우선 주위 환경을 최대껏 활용하게나. 버스 기사로부터 차장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면 주변에 앉아 있는 승객들에게도 눈치껏 협조를 얻어두란 말야. 화장실에 갈 때나 특히 평창에서 아침을 먹을 때 각별히 조심하고, 서울에 도착해서도 점심은 인계가 끝날 때까지 참아야 하네. 저엉 배가 고프거든 서류가방 속에 간식을 넣어두었으니 빵을 나눠먹도록 하되 그놈에게 물을 많이 먹여선 안 되네. 오줌이 자주 나오면 곤란하다 그 말이지. 또 그놈을 안쪽에 앉혔다고 방심하지 말게. 창유리를 깨서 유리조각으로 위협하거나 자해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심지어 자네 손목을 자르고 탈출할지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해두는 게 좋아. 모든 게 유비무환, 대통령 말씀이시네. 빌어먹을, 영동고속도로가 어서 뚫려야 할 ..

연재소설 2023.01.10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7회)

대용교도소(代用矯導所) “출판기념회를 여셔야죠.” “그런 짓 안 해.” 동료 의원들과 당원들에게 책값 핑계로 봉투 받는 걸 꺼린다는 말이었다. 청렴한 그의 인품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두 교수가 만나도록 주선해준 것 아들이 고맙게 여기고 있어. 한동네에 살면서도 먼 이웃으로 살아왔는데 김 형사 덕에 둘 사이가 친해졌대.” 두 교수는 경제학 교수인 최 의원 아들과 영양학 교수인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을 지칭했다. 양아들 이 교수는 김석을 가끔 이화장(梨花莊)으로 초대했는데 양어머니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김석을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고, 프 여사는 김석에게 넥타이핀 같은 가벼운 선물을 주곤 했다. 악수로 내민 영부인의 자상한 손길에서 정분이 느껴지면서도 김석은 마음 한 구석이 서운했다. 자상한 손길처럼 좀 더 ..

연재소설 2023.01.03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6회)

국회부의장 최남두 의원과의 대화 “혹, 우울증 같은 것 아닐까요? 자기가 택한 고생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을 테고.” 연희가 유서란 말에 말려들자 김석은 속으로 신이 났다. “아마 너한테도 찾아올지 몰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과 마지막 정을 나누고 싶을 거라구. 너를 만나러 오면 즉시 나한테 알려야 한다. 절대 유서 얘기는 꺼내지 말고. 한 시가 급하다.” “어쩌면 좋죠?” “혹시 숙모가 네게 편지 같은 것 보낸 적 있니?” “실은....여기 계세요.” “뭐라구? 의정부에?” “네. 저도 이상한 낌새는 챘어요.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다른 낌새는 없던?” “하여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어딨지?” “아까 나가시면서 금방 들어온다고 했는데....” “근처에 저수지나 바위절벽 같은..

연재소설 2022.12.27

연재소설[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5회)

아내를 찾아다니다 춘천행 첫 버스를 타면 오전 중으로 양구에 도착할 것이었다. 수니가 친정에 갈 리가 없지만 가까이 지낸 처제네 집 정도는 탐문할 참이었다. 첫차인데도 춘천행 버스는 번다했다. 김석은 창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 나이든 아줌마가 빈자리를 살피다가 김석 옆에 앉았다. 마음이 다급한 김석은 아줌마에게 물었다. “춘천에서 양구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소양강 땜에 물이 차기 전에는 가까웠지만 지금은 화천으로 돌아가야 하니 꽤 멀다우. 이따 차장아가씨가 타걸랑 물어보구래.” “참 그렇네요.” “양구 사는 분이 아니우?” “서울에 삽니다.” “면회 가는 거우?” “군인가족이 아닙니다.” “그럼 뭔 일로 양구 가는 거우?” 김석은 새벽잠을 설친 핑계를 대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혼자 마음..

연재소설 2022.12.20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4회)

함석헌 옹과의 흥정 서울대 법대생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시국을 뒤흔들었다. 서울대는 물론 다른 대학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종교단체, 노동단체에서도 연일 소요사태가 격렬했다. 불교 단체는 물론 기독교 단체에서도 추도예배를 거행했으며 언론에서도 사설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 총학생회에서는 전태일 추모 강연회를 열었는데 ‘부활과 4월혁명’을 주제로 삼았다. 김석은 기독교방속국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함석헌 옹(翁)을 중심으로 를 창간한 장준하 등 십여 명의 지도자들이 앉아 있었다. 김석은 함석헌과 두세 번 만난 사이여서 구면이었다. 를 정기구독할 정도로 애독자였기에 김석은 함석헌과의 대화가 의미 있게 여겨졌다. 당시 사상계는 한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지성지였지만..

연재소설 2022.12.13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3회)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 동향 업무는 쌓여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보과장이 김석을 과장실로 불러 어디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과장은 채증 업무 담당인 김석을 무척 아껴주는 상사였다. “가장 모범적인 정보형사가 왜 넋을 놓고 지내나?” “사실은 집에....” “무슨 일인데 그래?” “말 못할 일이 생겨서요. 그러니 휴가를 내주셔야.....” “뭐야? 이 사람이 돌았나, 서울대 동향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 갑자기 휴가타령이야? 사연이 있겠지만 채증업무의 중요성을 자네가 더 잘 알잖나. 문리대놈들은 모의재판을 관철시킬 모양인데 자네가 아니면 누가 행사장에 침투하겠어. 우리 식구 중에서 자네가 가장 학생답잖아. 그리고 법대놈들은 성모병원에 있는 전태일 시신을 인수할 계획인데 시신을 감시할 적임..

연재소설 2022.12.01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2회)

수니의 첫 번째 가출 사십오륙 년 전, 양구경찰서에서 서울 동대문경찰서로 전근되어 미아리 산동네에서 수니와 신접살이할 때였다. 근무교대를 마치고 오후 일찍 귀가해서 물을 마시려고 부엌문을 열었는데 벽에 붙은 찬장에 하얀 구더기들이 기어다녔다. 판자 문틈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구더기도 있었다. 얼른 찬장문을 열어보았다. 선반 위에 나란히 놓인 네 개의 밥그릇 중에서 왼쪽 구석에 놓인 그릇에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고 그 속에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먹다 남은 찬밥이 여름 무더위에 쉬어터져 생긴 구더기였다. 다른 세 개의 밥그릇도 살펴보았다. 바로 옆에 놓인 그릇에는 푸르스름한 콤팡이가 끼어 있고, 그 옆에 놓인 그릇에는 누르스름한 곰팡이가 끼어 있고, 마지막 그릇에는 희읍스름한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연재소설 2022.12.01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1회)

저는 착한 사람만 잡아먹어요 북적대는 피서객과는 달리 바다는 잔잔했다. 수니는 은영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혜미와 이야기를 나누던 김석이 불쑥 낯선 말을 꺼냈다. “진짜 사람 맞아?” 그 말에 혜미의 얼굴이 활짝 열렸다. 김석의 질문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저는 악마에요. 아버지를 닮은 거죠. 아버지는 악마였어요. 어머니가 천사여서 저는 사람의 탈을 썼을 뿐에요.” “어쩐지 혜미의 몸에서 무섬기가 풍겨. 그런데 그 무섬기에서 신선한 생기가 느껴지거든.” “저도 선생님 부부를 뵈면 생기가 돌아요. 어떤 식으로든 두 분과 인연을 맺고 싶어요. 특히 사모님과는 헤어지기 싫어요. 남편에게 락스로 몸을 닦으라는 말에 매혹되었죠. 그처럼 도량이 넓으신 분과 알고지내는 건 대..

연재소설 2022.12.01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20회)

유혜미는 악마일지 모른다 “참,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 때 과학을 맡았다지?” “과학을 모독하지 마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모독이라니?” “왜 애정문제를 논하는데 학과목을 따지는 거에요?” “아니, 과학을 먼저 꺼낸 게 누군데?” “죄송해요. 제가 실언했네요. 선생님과 키스한 후로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꽤 받나봐요.” “오늘 하루 스트레스도 풀고 즐겁게 보내자구.” “그래요. 큰 성과도 올리고.” 성과란 말에 김석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모텔방에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 그 생각뿐이었다. 밤이 기다려졌다. 저 뽀얀 살결과 미끈한 몸매가 품속에서 꿈틀거릴 모습을 상상하며 김석은 미소를 지었다. “뭘 상상하시길래 혼자 미소 짓는 거죠?” “웃지도 못해? 찡그리고 있으란 ..

연재소설 2022.12.01

[인기작가 잔아의 장편소설] 아내 찾아 90000리 (제19회)

유혜미의 편지 “멋지긴 뭐가 멋져. 내가 바보였지.” “여보, 바보일 때가 젤 아름다운 거야.” 수니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갑 속에서 빛바랜 편지 한 통을 꺼내왔다. 유혜미와 마지막 헤어질 때 받은 편지라고 했다. 언니, 생각 할수록 큰 죄를 지었어요. 제가 언니에게 남편을 양보해달라고 한 말, 이제 생각하니 너무 철없는 짓이었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웃으시면서 그건 안 돼! 그러셨죠? 언니는 천사에요.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은영아빠와는 딱 한 번 키스한 게 다에요. 믿어주세요. 유혜미 올림” “이걸 삼십 년 넘게 보관해온 거야?”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했어. 당신과 헤어지고 싶으면 무기로 쓸려고 숨겨뒀지.” “그런데 남편을 양보해달라는 말이 뭔 소리야?” “글쎄 집에 찾아와서 어이없는 말을 하..

연재소설 2022.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