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22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20회)

꿈결에도 그리운 배승태 동무에게 동호는 지금도 옛날 어느 겨울밤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배승태가 서울 상부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날 밤 동호는 여느 때처럼 밤이 깊어서야 배승태가 입감된 11호 독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북한에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하나 있는데 배승태는 행복했던 추억담을 틈이 날 때마다 자랑삼아 지껄이곤 했다. 특히 아내 윤희정의 모습을 회상할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밤에 집체로 춤 출 때는 안해가 젤 고왔디랬시오.” 윤희정은 보기 드문 미모인데다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며 성분이 좋은 당 간부의 딸이었다. 포항에서 초등학교만 나와 농사..

연재소설 2023.07.04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9회)

공비도 아내를 팽개치능교? “이잔 빨갱이 때를 훌훌 벗고 밝게 살아보레이.” “머이? 빨갱이?” “빨갱이카모 어둡잖나. 지옥처럼 어두분 게 빨갱이 아이가. 난 세상을 밝게 살란다.” “려편네가 맨날 술을 도가니로 마셔대구, 사내들 껴안구 히히대는 거이 밝게 사는 게가? 기건 배때기 불러개디구 지랄떠는 거라메.” “역시 빨갱이 말투군. 늬캉 내캉은 연분이 아닌기라. 일찌감치 구정을 내얀다카이. 미친 인간!” 지화는 꽥 소리를 내질렀다. 장사도 당장 때려치우자며 남편을 꼬나보았다. 배승태는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멋대로 하라메. 날래 치우면 내레 편해 좋디.” “자식도 날래 치우소. 강식은 당신 자식이 아니잖소. 강식을 북쪽 자식만큼 생각했능교?” 지화는 입을 벌린 채 헤헤거렸다..

연재소설 2023.06.27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8회)

머이? 내가 총잡이었다 기거네? “와 야속한 팔자가 멋진교?” “기거는 사람을 긴장시키디. 긴장시키니께니 싱싱한 게구.”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심더.” 어느새 강식은 아버지의 말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늬도 알디? 흐르는 물은 싱싱하고 괸 물은 썩잖네?” “.....” “썩은 물에서 고기가 살 수 있간? 살 수 없디?” “네.” “인간도 고기처럼 생물이니께니 탁한 데서는 병들디?” “네.” “병들지 않으려믄 긴장하며 살아야갔디?” “그라요.” “예수님이나 석가모님도 탁한 걸 싫어하셨디? 기러니께니 긴장하며 사신 분들이디? 긴장하며 사신 분들이니께니 늬처럼 야속한 운명을 타고난 분들이디? 내 말을 이해하겠네? 어드래서 늬가 위대한디 인자 알간?” “.....” “날래 대답해보라우. 긴장이 머겐? “..

연재소설 2023.06.20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7회)

에미나이는 날 빨갱이로 여긴 거라메 “머이?” “아부지가 한번이나 우릴 식구로 생각했능교? 우리가 남이지 식군교? 아부지 식구는 북한에 있잖소.” “맞디. 리북에 있는 거이 내 식구디. 네깟 종자들은 남이디. 암 남이구말구.” “그라믄서 와 날 나무라능교? 내가 담밸 피우등가 술을 마시등가 와 상관잉교? 내사 나미 새끼 아닝교? 북쪽 자식이나 실컷 사랑하소.” “기럼. 기렇구말구. 실컷 사랑하디.” 배승태는 방을 나와 문을 쾅 닫았다. 여전히 가슴이 떨렸다. 서러운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강식이 왜 저럴까? 왜 갑자기 반항하는 걸까? 중학생일 때 일시 말썽을 피운 적이 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던 강식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따르던 착한 아들인데, 아무래도 지화가..

연재소설 2023.06.14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6회)

무장공비가 어떻게 장사속을 익혔지? “자네도 알디만 내레 북한에 두고온 식구밖에 더 있갔어? 우기고 우기다가니 누나가 자꾸 조르니께니 장가는 들었디만서두.” 결혼을 하고 몇 달이 지나자 누나는 시내 목 좋은 곳에 가게를 마련하여 동생한테 횟집을 차려주었다. 배승태는 지화와 함께 밤낮으로 장사에 매달렸다. 손님도 하나 둘 불어났다. 결혼 이듬해에는 아들도 낳았다. 아들 이름은 지화의 요구대로 강할 강자에 돌림자인 식자를 붙여 강식이라고 지었다. 배승태는 자식을 얻게 되자 세상살이가 즐겁기만 했다. 애가 귀염 떨 나이가 되고부터는 이북에 두고 온 아내 생각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장사도 한 해가 다르게 번창해갔고 십 년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집과 상가를 장만해서 업소도 넓혔다. 배승태는 점점 사업에 재미가 붙어..

연재소설 2023.05.31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5회)

가석방된 배승태 결혼하다 서울경찰청에서 정보형사로 근무하던 동호는 학생데모 방지 소홀로 징계를 먹고 동해안으로 좌천당했는데 처음 근무지가 강릉경찰서였다. 동호는 아예 좌천을 당한 김에 죄수들과의 생활을 체험하고 싶어 모두가 기피하는 유치장근무를 자청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생활에서 죄수들과 어울렸잖은가. 그 후 동호는 일 년 동안의 유치장 근무를 마치고 진리포구 임검소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곳에서 아내 성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본서(本署)로 들어가 정보과 근무를 맡게 될 무렵 ‘울진·삼척사건’이 터지고 배승태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방이 차디?” 배승태가 손으로 방바닥을 짚어보며 말했다. 해가 지자 바닷바람에 노출된 창고방에는 을씨년스런 냉기가 흘렀다. “보일러 온도를 높였..

연재소설 2023.05.23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3회)

고교 일학년 때 실성한 연주 배승태는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동호는 얼른 간수를 불러 수갑을 채워 끌어냈다. 그리고 복도에 세워놓고 일반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주먹으로 얼굴과 배를 번차례로 후려쳤다. 사무실로 끌려나와서까지 배를 움켜쥘 정도로 동호의 주먹은 오달졌다. 동호는 화를 가라앉히고 나서 간수를 돌려보냈다. 이제 수사과 사무실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한동안 음습한 적막이 맴돌았다. 책상과 의자가 즐비한 실내 한복판에서 연탄난로가 두 사람의 지친 숨소리를 태울 뿐이었다. 동호는 난로 위에 놓인 물주전자를 들어 두 컵에 채운 다음 하나를 배승태에게 내밀었다. 물을 받아 마시는 동안 그의 눈빛이 점점 눅어졌다. “미안하오.” 동호는 손수건을 꺼내 배승태의 입 언저리에 묻은 피..

연재소설 2023.05.09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2회)

개새끼는 개처럼 다룰 수밖에 없어 폐정이 되고 간수들이 죄수를 압송하자 동호는 방청석 뒤쪽으로 걸어갔다. 예상한 대로 사십대 후반의 낯익은 여인이 뒤편에서 손수건으로 입을 싸쥔 채 울고 서 있었다. 배승태의 누님이었다. 마침 창으로 스며든 엷은 햇살이 그녀의 하얀 옷깃에 빛가루를 뿌렸다. “수고하셨심더. ” 여인은 인사말을 주고 나서 지난번 동생을 면회시켜준 배려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동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두 손을 내밀어 동호의 손을 살포시 감싸쥐었다. 한복 차림인 여인의 몸에서는 풀내가 설핏했다. “일이 잘 돼갈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동호의 말에 여인은 또 눈물을 흘렸다. “유죄등가 무죄등가 법이 알아서 하겠지만서도 동생을 껴안아보지 몬하는 처지가 더 가..

연재소설 2023.05.02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1회)

부뚜막에 놓아둔 먹다 남은 밥사발 그런 난처한 입장을 예견해서 생각해둔 핑계가 있기는 한데 그 또한 어색한 변명에 불과했다. 송두문은 계속 행방불명 쪽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종종 허는 말이, 들녘이서 머슴살이나 허겄다고 푸념했걸랑유.” “어디로 갔는지 전혀 집히는 데가 없습니까?” “당최 모르겄는디유.” “막역한 고향친군데 행선지를 모르다뇨?” “암 때구 기별을 주겄쥬.” 변호인은 황억배를 증언대로 세우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송두문의 증언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피고가 가슴에 품었던 권총을 꺼낸 것은 어느 순간이었나요?” “즈이 작대기에 두들겨맞고 금방유.” “어디다 대구 조준했나요?” “지 가슴팍에다유.” “불발이었다죠?” “예에.” “불발인 걸 어떻게..

연재소설 2023.04.25

[인기작가 잔아의 다시 읽고 싶은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제10회)

불발인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법정에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배승태를 호송해온 동호는 피고석 뒤에 앉아 그의 태도를 지켜보았다. 방청석에 빈자리가 없을 만큼 관심이 쏠리는 재판이었다. 무장공비의 재판은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검거와 자수의 정황에 대한 심리분석이 방청객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피고는 스스로 자기 목을 옭아매고 있잖은가. 방청객 태반이 피고에게 동정의 눈길을 주는 재판정이었다. 동호는 피고인에 대한 자기의 동정적인 심정에서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의와 진실에 너무 집착하는 자기 자신이 혹시 결벽증 환자는 아닐까 싶었지만 자부심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정신문이 끝나고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한 진술이 시작되자 법정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 사실만 보아도 방청객이 심..

연재소설 2023.04.18